연산동의 두 번째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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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집은 동네를 구성하는 블록 내부 작은 골목길 안에 위치한 집이었다. 하늘색 철문을 지나면 작은 마당에는 단풍나무와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있었다. 우리 집은 방 한 칸과 마루 그리고 마당에 부엌과 씻는 용도의 계단 밑 공간이 있었다. 방 한 칸이라 좁은 느낌이지만 그때 사진을 보면 마루가 좁지 않아 미닫이문으로 구분된 2개의 방 같은 느낌이다. (사진의 중요성)

이 집에서는 두 가지의 추억이 떠오른다.

 

빨간 도시락 가방과 금색 방울 소리

7살 때 처음으로 외부 조력에 의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봉고버스를 타고 예쁜 원색으로 꾸며진 유치원으로 향했지만 부모님은 1층에 산부인과가 있고 그 옆 계단으로 올라가는 2층의 웅변학원에 나를 보내셨다. 아마 소심했던 나를 웅변으로 변화를 기대하셨던 것 같지만 지금도 많은 이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100미터 달리기 전 출발선에 서있는 것 마냥 긴장된다.

당시 웅변학원에서의 점심은 집에서 반찬을 가져가면 학원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해서 먹는 방식이었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따뜻하고 향긋한 밥 냄새가 코끝을 찌러든 기억이 생상하다.

반찬을 가지고 다녀야 하나 당연히 도시락 가방도 필요했겠지? 나의 선택인지 엄마의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시락 가방은 빨간색에 하얀색 꽃무늬가 들어간 가방이었고 특이점은 금색 방울이 달려있었다. 그러니까 가방을 들고 다니면 자연스레 방울 소리가 딸랑딸랑 울렸다.

당시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하셨는데 ‘홀치기’라는 일이었다(직물 염색 방법 중 하나), 집에 있을 때면 항상 엄마 옆에서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학원을 마치면 학원 버스를 타고 집 근처에서 내리면서 빨간 도시락 가방의 역할이 시작된다. 골목에 들어서면 방울 소리가 골목길을 울리기 시작한다.

골목에 들어설 때면 곧 엄마를 볼 수 있다는 설렘이 있었을 것이고, 엄마는 오늘도 아들내미가 학원을 마치고 무사히 집에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부산 집에 가면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현재 집 역시 골목 안쪽 집이다 보니 가방을 끌고 가면 ‘드르렁’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지금 그 골목길을 들어서는 기분은 빨간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니던 7살 때와 다를 바 없는데, 내 눈에 엄마는 여전히 젊고 예쁜데, 아들은 어느덧 중년의 나이, 엄마는 할머니가 되었다.

7살 때나 지금이나 집 앞에서 하이톤으로 ‘엄마~~’라고 부르는 건 달라지지 않았다.

 

받아쓰기와 오후반

그렇게 7살을 보내고 드디어 초등학교에 입학(당시에는 국민학교)했다. 초,중 시절에는 대부분 좋지 않은 기억으로 가득해 애써 떠올리지도 않고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도 없다.

입학 당시에는 학생들이 많아 12개가 넘는 반이 있었고 교실이 부족해 2학년 때까지 오전/오후 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했다. 11, 12반은 오후에 등교하는 형태였고, 나는 그 대상이었다.

 

당시 1학년은 지금처럼 선행학습이 활발하지 않았던 때라 입학 후에는 한글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곤 했다. 학창 시절 받아쓰기만큼 평균 점수가 높은 종목은 없었다. 거의 만점을 기록하곤 했는데, 당연히 예습을 많이 했기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엄마와 함께였기 때문이겠지.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하셨고 그 이후에는 외부에 출퇴근하시며 일을 하셨다. 받아쓰기하던 1학년 때 엄마는 홀치기를 하시고 그 옆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그냥 엄마가 옆에 있었고 함께 한다는 게 행복했기 때문에 공부가 재미있었고 받아쓰기 시험이 두렵지 않았던 게 아닐까.

혼자서 등교가 가능한 시점부터 엄마는 집 밖에서 일을 하시기 시작했고 그떄부터 당연히 혼자 공부했다. 엉덩이가 무접지 않고 집중력이 좋지 않았던 공부를 ‘안’하면서 ‘못’하는 학생이 되어 지금의 내가 만들어졌다.

오후반 등교 시절 날이 따뜻했던 계절에는 엄마와 마루에서 햇살을 맞으며 오전을 함께 했다. 걱정 근심이라는 말도 알지 못했던 그 시설 마냥 좋았다. 가을이 되면 빨간 옷으로 갈아입던 단풍나무 보는 재미도 있었다.

문득, 아직은 건강하시지만 내가 앞으로 부모님을 몇 번이나 더 뵐 수 있을까를 생각한다. 그날이 오지 않길 바라기 때문인지, 늙어가시는 부모님의 얼굴이 안타까운 반면 나의 자리는 여전히 위태롭기 때문인지. 그래서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이 머릿속에 자주 맺히고, 눈물도 고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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