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널 원해
지나온 시간 중에 가장 결정적인 선택이라고 하면, 첫 번째로 떠오르는 기억이 고등학교 진학이다. 노력해 보자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지레 겁먹고 포기한 상태로 학교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그 선택에 영향을 끼쳤던 마음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시작과 실패의 두려움은 많이 옅어진 상태지만 말이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는 부산 서면 번화가와 길 하나 사이로 마주한 공업고등학교였다. 교문 앞에 서면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이 보이고, 왼쪽에는 작업실과 강당이 있는, 당시에는 엄청나게 거대했던 건물이 학교를 보호하듯 늠름하게 서 있었다. 5층 건물 하나만 있었던 중학교와 대비된 모습을 17살의 작은 소년의 눈에는 신기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을 보며 함께 진학한 친구 하나 없이 홀로 떨어진 이 큰 학교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조금은 겁이 나기도 했다. 사실 3년 동안 함께 할 다른 동네 친구들의 낯섦 때문이었으리라.
1학년 1학기 때 1분단 맨 뒤쪽에 자리를 배치받았다. 키순인지 번호 순인지 정렬 기준은 기억나지 않는다. 착하지만 조금 노는 아이들 틈에서 나름 잘 지냈던 기억이 있다. 2학기가 되면서 주변 친구들이 다 바뀌었고, 그때 부터 흥미로운 고등학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노는 아이 둘의 자리는 덩치가 큰 곰 같은 녀석과, 키는 나보다 작고, 곱슬머리에 까만 피부와 짙은 눈썹의 얼굴을 지닌 친구가 옮겨 왔다. MP3 플레이어가 나오기 직전이라 아직 워크맨이나 시디플레이어를 들고 다니며 듣던 시절이었는데, 그 두 친구가 듣는 음악에 귀가 쫑긋해지기 시작했다. 그들이 듣던 장르는 힙합이었고, 데뷔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드렁큰 타이거였다.
4교시 후 점심시간, 1학년 12반 1분단 뒷좌석에서 덜커덩하며 카세트 재생된다.
<드렁큰 타이거 1집 - 난 널 원해>
그 둘은 쉬는 시간마다 노래를 듣고 랩을 따라 하면서, 교실에 비트 넣는 역할을 했다. 매일 같이 연습하던 그들 덕분에 옆에서 구경하며 듣기만 한 나조차도 다 외울 정도였으니, 그들의 랩에 대한 열정은 Tiger JK, DJ Shine에 못지않았다. 2026년 지금, 두 명이 녀석 중 곱슬머리 친구와는 꾸준히 연락하고 있다. 이제는 제일 친한 친구가 되었고, 서울에 살고 있는 유일한 고향 친구이기도 하다.
오랜만에 내 생일을 핑계로 합정동에서 만나, 말없이 식사하고, 카페에 앉았다. 1년여 만에 만난 지금, 둘 다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논리적인 비난과 식당 할머니 못지않은 찰진 욕으로 서로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소중하고, 사랑하는 친구다. 그 녀석은 사랑한다는 말을 가끔 하지만, 나는 절대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랑한다.
아주 가끔, 3, 4년에 한 번씩 중3 때 다른 선택을 했으면 인생이 달라졌겠느냐는 상상을 종종 한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금 내 곁에 있는 친구들은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사실 때문에 금방 생각의 주머니를 거둬들인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비슷한 삶을 살고 있었겠지만, 20년 넘게 함께 하고 있는 곱슬머리 친구는 만나지 못했을 거라는 건 명백하다.
고맙다는 이야기도 잘 건네지 않는 친구이지만, 이 글을 쓰고 나서 무심한 척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봐야겠다. 그럼, 전화가 오겠지? 누울 자리 봐뒀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