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예진 — 잘 봤다는 말 대신
잘 봤다는 말 대신
영화 비평의 언어는 어떻게 시작되는가.
풍크툼에서 출발해 산파술로 완성하는 글쓰기에 대하여.
내 느낌에서부터 시작하기
강연의 출발점은 롤랑 바르트의 《밝은 방》이다. 바르트가 만년에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진 한 장에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하면서 개념화한 두 가지 — 스튜디움(studium)과 풍크툼(punctum). 스튜디움은 교양, 보편적으로 작품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 풍크툼은 라틴어로 '찌름', 개인적인 충격과 여운이 다가오는 순간이다.
바르트 이전까지 비평은 스튜디움 위주 — 사회적 맥락, 창작자의 의도를 해석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풍크툼 개념 이후 비평계에 혁신이 일어났고, 개인적 감상에서 출발하는 비평이 한때 유행했다. 그러나 한국 영화 비평은 여전히 형식주의 비평이 대세이고, 풍크툼에서 시작하는 글은 드물다.
풍크툼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이기만 한 개념이 아니에요. 이 순간, 이 시공간에서 내가 이 작품을 만나서 찔린 거라면, 그건 굉장히 관계적인 의미를 갖고 있어요. 이 사회 안에서 내 감각이 형성되었고, 그 사회 안에서 작품이 내게 왔기 때문에.
— 박예진박예진이 강조하는 것은 풍크툼의 사회적 차원이다. 바르트의 경우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경험이 사진을 다르게 보게 했듯, 특정한 경험과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가 있다. 어머니를 잃지 않은 '주류'에게는 스튜디움으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지점 — 그것이 풍크툼이 열어주는 비평의 가능성이다.
스위치 — "어떤 점이?"에서 "어떤 장면이?"로
박예진의 방법론은 간명하다. 영화를 보고 나서 정보를 찾지 않는다. 검색하지 않는다. 메모창을 열거나 친한 친구와 1시간 이상 쏟아낸다. "뭐야 진짜" "넌 뭐가 제일 별로였어" — 이렇게 거르지 않은 날것의 감상부터 시작한다.
다들 명작이라고 하는데 내가 지루하다고 느꼈어. 그 느낌을 잡아서 써 나가는 걸 추천드려요. 보통 유명한 사람들 글 보고 나면 내가 처음 느꼈던 감각은 한 켠에 밀려나 있잖아요. 저는 그런 게 되게 안타깝다고 느껴요.
— 박예진핵심은 하나의 장면에 대한 구체성이 글 전체를 밀고 나가는 힘이 된다는 것이다. 남들이 스쳐 지나간 한 편의 신(scene)에 깊이 들어가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나머지가 제네럴하더라도 그 하나의 장면이 도입부나 결말에 들어가면 글의 밀도가 높아지고 시각이 부여된다.
다들 찬양하는데 나는 불편하게 본 영화
첫 번째 사례는 오펜하이머. 출발점은 진 테트록의 섹스신에 대한 불편함이다. 청문회 장면에서 백인 중년 남성들이 양복을 입고 앉아 있는 자리에, 캐릭터 한 명만 벌거벗은 채 섹스하는 모습을 굳이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
여기서 질문이 체인으로 연결된다. 이 장면만 문제인가 → 영화 안에 다른 여성들은 어떻게 대우받았나 → 벡델 테스트를 통과하지 못한, 최근 5년간 본 신작 중 최초의 영화 → 흑인은 왜 한 명도 없나 → 실제 맨해튼 프로젝트에 흑인이 4명 있었는데 크리스토퍼 놀란은 쿨하게 삭제 → 핵실험 장면은 왜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했나 → 히로시마의 피해는 사운드로만 처리하고 '진공 상태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의 의미 → 인터스텔라부터 이어지는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과한 낙관.
진 테트록의 섹스신이 불편하다 — 여기서 시작해서 이 감독의 사고 방식과 세계를 보는 방식, 이 작품에 내재된 사고 방식 자체가 나와 핏이 맞지 않다. 여기까지 온 거죠.
— 박예진나는 너무 재밌었는데 사람들이 별로라고 한다
이경미 감독의 《비밀은 없다》. 관객 25만 명, 상업적으로 실패한 영화. 박예진은 세 가지가 좋았다 — 딸과 엄마 캐릭터가 전형적이지 않고 엉망진창인 것, 정신없지만 당대의 불안과 혼란한 감각을 구현한 것, 사건의 배후가 거대 악이 아니라 한 집안 구석에 있다는 마무리의 리얼함.
여기서 방법론이 바뀐다 — "나는 좋은데 왜 다른 사람들은 싫어하지?" 평점 낮은 순으로 검색해서 욕하는 사람들의 논리를 분석한다. 떡밥 회수 실패, 어이없는 반전, 잡탕찌개. 흥미로운 발견: 이 세 가지가 정확히 박예진이 《곡성》에 대해 느꼈던 감상이었다.
공통점: 무속 vs 가톨릭, 딸이 사건 중심, 폐쇄적 시골 마을, 굿, 외지인 등장. 결정적 차이: 곡성은 외지인이 악마였다며 초자연적 존재로 도망쳤고, 비밀은 없다는 범인이 그냥 집안의 아빠였다. 박예진은 곡성의 결말을 "이 한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비극의 원인을 제대로 생각하지 못한 게으르고 비겁한 태도"라고 본 반면, 비밀은 없다의 결말이야말로 "이것이 리얼이다"라고 느꼈다.
서래는 왜 바다에 들어가서 안 죽고 서서 죽나
세 번째 사례는 박찬욱의 《헤어질 결심》. 좋긴 좋은데 매끄럽지 않고, 흐름이 뚝뚝 끊기고, 어색한 영화. 가장 이상했던 장면 하나 — 서래의 죽음. 보통 바다에 걸어들어가면서 죽는데, 서래는 해변에 구덩이를 파고 서서 물을 맞아 수장되는, 삽까지 가져온 아주 복잡한 죽음.
여기서 감독의 전작으로 돌아간다. 박찬욱 영화에서 산과 바다의 패턴: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지른 자들은 산에서 죽고(《박쥐》, 《친절한 금자씨》), 별로 잘못하지 않았거나 억울하게 죽는 이들은 물에서 죽는다(《복수는 나의 것》, 《박쥐》의 또 다른 인물). 서래는 물에서 죽으면서 동시에 서서(세로로) 죽는다 — 선인도 악인도 아닌, 박찬욱 영화 세계 안에서 윤리적으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이상한 자세에는 이 사람은 선인도 아닌데 악인도 아니고, 박찬욱 영화 세계 안에서 윤리적으로 독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그렇게 파헤치다가 전작 3개를 다 파헤쳐가지고 길게 글을 쓰게 됐어요.
— 박예진질문을 하면 생각이 이어질 수밖에 없고, 결국 글이 마무리된다
세 편의 영화를 관통하는 방법론의 뿌리는 그리스 철학이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 소극적 산파술(상대가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을 이끌어내는 방식)과 적극적 산파술(스쳐 지나가는 감각이나 사고를 물고 늘어져 언어화시키는 방식). 박예진은 후자를 혼자 머릿속에서 돌린다.
완성도 있는 글보다 참신한 질문을 던지는 글이 비평으로서는 더 좋다고 생각해요. 비평은 이 작품에 대한 평론가의 고유한 시각을 보여주고, 그걸 자신만의 스타일로 해석해 나가는 게 가장 중요한 장르니까요.
— 박예진형식주의, 정신분석, 여성주의, 탈식민주의
한국에서 가장 많이 하는 영화 비평은 형식주의 비평이다. 영화학과가 독립 학과로서 존재하기 위해 문학이나 다른 인문사회과학과 차별화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 영화 형식(미장센, 편집, 촬영) 자체를 파고드는 방법론이 발달했다.
정성일 — 풍크툼형. "나는"을 가장 많이 쓰는 중년 남성 평론가. 개인적 감상에서 출발해 엄청난 지식으로 스튜디움과 엮어 대작을 만드는 스타일. 이동진 — 스튜디움형. 객관적 정보를 방대하게 조사, 종교학 출신으로 텍스트 중심 해석. 독자들이 "의견 좀 그만 말해, 정보만 줘"라고 요구한 시대의 욕망을 채워줌. 김병규 — 극단적 형식주의. "나는 영화에서 내용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형식은 곧 내용이다."
박예진은 영화학과 출신 비평가의 글보다 다른 분야(철학, 문화인류학, 심리학) 기반 비평가의 글이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영화 형식은 공부하면 금방 알 수 있지만, 비평 이론은 결국 인문사회학이기 때문에 한 분야에 대해 깊이 알고 나서 영화 이론을 더했을 때 진짜 깊이가 나온다.
구린 영화도 재밌다 — 감독의 무의식이 가장 잘 보이니까
등단 이후 "평소 같으면 절대 안 봤을" 영화를 엄청 많이 봐야 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발견한 것: 못 만든 영화일수록 감독의 무의식이 잘 보인다. "이 감독이 왜 이렇게 구리게 만들었을까"를 고민하는 것 자체가 재미있고, 시대성을 파악할 수 있다.
좋아하는 영화에 대해 쓸 때 의욕이 가장 생기고, 싫어하는 영화에 대해 쓸 때는 "못 만든 감독의 무의식을 굳이 알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고백도 있었다.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은 "아무도 그렇게 말을 안 해서 반갑다"는 반응이 오는 글 — 다른 시각을 보여줄 수 있을 때 의욕이 생긴다.
정보와 나의 주장의 비율을 조절하는 건 사실 너무 어려워요. 저는 다 써 봐요. 일단 쭉 쓴 다음에 전체적으로 다시 보면서 쳐내려가는 거예요. 초보는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일단 눌러 쓴 다음에 계속 가다듬면서 쳐내고, 이 과정을 해야 균형을 맞출 수 있는 것 같아요.
— 박예진글쓰기 루틴에 대해 — 10대 때부터 20년간 블로그를 해왔고, "본 영화에 대해 비평을 쓰기 전까지 다음 영화를 보지 마라"는 자기 미션을 1년간 실행한 적도 있다. 읽는 것이 생활이고, 쓰는 것은 읽는 시간의 10분의 1이다.
검열하지 않는 첫 문장의 윤리학
이 강연의 가장 날카로운 지점은 방법론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 "감상을 검열하지 않기" — 이 단순한 한 문장이 84분 전체를 관통한다. 다들 명작이라고 하는데 지루하다고 느꼈을 때, 유명한 평론가의 글을 먼저 찾아보는 대신 그 지루함을 잡고 놓지 않는 것. 이것은 글쓰기 기법이 아니라 자기 감각에 대한 신뢰의 문제다.
풍크툼의 재해석이 주목할 만하다. 바르트의 풍크툼을 단순히 '주관적 감상'으로 읽는 대신, 박예진은 그것의 사회적 차원을 끌어올린다. "이 순간, 이 시공간에서 내가 이 작품을 만나서 찔린 거라면, 그건 내 감각이 이 사회 안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라는 해석은, 개인적 감상과 사회적 비평 사이의 이분법을 무효화한다. 풍크툼은 주관적이되 사적이지 않다. 나만 찔리는 것이 아니라,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함께 찔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 편의 영화 분석이 보여주는 것은 질문의 체인화다. 오펜하이머에서는 섹스신의 불편함 → 영화 내 여성의 위치 → 벡델 테스트 → 흑인 부재 → 핵실험의 미학화 → 감독의 세계관으로 연쇄한다. 비밀은 없다에서는 내 호감 → 타인의 혐오 → 곡성과의 비교 → 대중 정서의 구조로 확장한다. 헤어질 결심에서는 이상한 죽음 → 산과 바다의 패턴 → 전작 분석 → 윤리적 위치의 독해로 심화한다. 세 가지 방향이 전부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하나의 구체적 장면에서 출발해, 왜?를 반복하며, 작품 바깥으로 나갔다가 다시 작품 안으로 돌아온다.
철학과 출신이라는 이력이 방법론의 뿌리를 설명해준다. 소크라테스의 적극적 산파술 — 스쳐 지나가는 감각을 물고 늘어져 언어화시키는 것 — 이것이 박예진의 비평 방법론 전체를 요약한다. 그리고 이 방법론이 영화 비평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 강연의 진짜 가치다. "잘 봤다"에서 멈추지 않고 "어떤 장면이?" 한 번 더 묻는 것 — 이것은 영화뿐 아니라 전시를 보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풍경을 마주한 뒤에도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사유의 기술이다.
마지막으로, "완성도 있는 글보다 참신한 질문을 던지는 글이 비평으로서는 더 좋다"는 선언은 글쓰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에게 향한다. 완벽한 답을 써야 한다는 압박이 글을 못 쓰게 만든다면, 좋은 질문 하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 결말을 쓰고 나서 첫 문단을 다시 쓰라는 조언도 같은 맥락이다 — 글은 처음부터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끝에 도달한 뒤 처음을 다시 봤을 때 비로소 모양을 갖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