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 맺힌 투명한 유리잔
위스키 한 잔을 따른 후 향과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즐겼다. 위스키가 주인공이지만, 유리잔의 벽에는 향을 풍부하게 만들기 위해 흔들었던 흔적들이 벽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위스키의 농도만큼이나 그 속도는 천차만별이라, 그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이기도 하다.
바닐라 향이 매력적인 카발란 솔리스트는 알콜향이 다소 강해서 맛에 큰 매력은 없다. 하지만 그 향 때문에 금요일 밤마다 온몸을 알콜로 적시게 만든다.
적당량만 따른 후 충분히 즐기면, 금새 잔은 비어버린다. 평소라면 취한 몸을 가누기 힘들어 바로 잠들어 버리지만 오늘은 컵을 깨끗이 씻고 싶다. 약간이나마 몸을 깨우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물이 빠지라며 거꾸로 세워둔 유리잔에는 무색무취의 물이 유리잔의 무늬가 되어 있다. 오래된 잔을 꺼내면 먼지와 얼룩이 섞인 흐린 자태로 존재한다.
나 또한 점점 흐릿한 존재감으로 세상에 뭍어가는 중이다. 흐릿함은 점차 사라져 어느 곳에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상태가 되겠지. 사는 방식은 다르지만 다들 한 곳에서 모이게 될 것이다. 누구는 그곳에 닿았음에도 여전히 존재감을 내뿜겠지만, 대부분은 죽음으로서 할 일을 다하게 된다.
결국 죽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