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할 자료 출처:
「1977.4.8 스나이더 대사 면담록」, 『한·미국 정무일반, 1977』(외교사료관 등록번호: 10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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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대해 간단하게 말하면, 1977년 4월 8일 박정희가 미국에서 막 돌아온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미대사와 면담하면서 나눈 대화 중 김대중과 일부 민주화운동 인사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그 부분을 잘라서 여러분께 보여드리려고 하는데, 그냥 자료를 보기에 앞서 살짝 배경설명이 있으면 더 좋겠죠? 이 대화의 배경을 조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당시는 긴급조치가 상시화된 유신독재시절이었는데, 1975년 이후에는 대학가와 종교계, 일부 정치가를 중심으로 서서히 유신에 대한 반대투쟁이 점점 더 거세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76년 3월 1일 소위 ‘명동사건’이라고도 불리는 ‘3·1민주구국선언’이 이루어졌습니다. 명동성당에서 3·1절 기념미사가 진행되었고, 미사 마지막에 ‘민주구국선언’이 낭독되었는데, 그 내용이 정권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었기에 해당 미사에 참여한 윤보선, 김대중, 함석헌, 문익환, 함세웅 등의 주요 인사들이 구속되었습니다. 사실 내용을 보면, 그럴 정도인가 싶지만, 체제에 대한 비난을 일체 허용하지 않는 긴급조치시대에 이건 정부 전복시도로 보였습니다.
이 사건은 야당과 재야의 지도급 인사들이 종교계와 연대하여 목소리를 낸 사건이자, 사건 이후 대다수 구속당해 전원이 실형을 받았다는 점에서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이 사건이 한미 간의 현안으로까지 커졌다는 점이 오늘 소개할 자료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흥미로운 부분입니다.
그렇다면, 이게 왜 한미간 현안으로까지 커졌을까? 그건 당시 미국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0년대 중반 당시 미국은 도덕성 측면에서 국제사회와 국내여론 모두에게 공격받고 있었습니다. 베트남전쟁의 실패,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 등은 “세계를 지도하는 패권국가로서 미국이 온당한 자격을 갖춘 국가인가?”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미 행정부로서는 대내외적으로 미국의 신뢰와 가치를 회복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77년 ‘인권’과 ‘도덕’을 정면에 내세운 카터 행정부가 집권합니다. 카터 행정부는 미국의 대외정책에 ‘인권’과 ‘도덕’과 같은 가치를 결부시켜 국내외에서 미국이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민주당이 장악한 미 의회 역시 경제·군사원조 예산 심의·집행에 있어서 ‘인권’을 강조하기 시작하죠. 미국의 지원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박정희 정권과 카터 미 행정부, 특히 미 의회와의 심각한 갈등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됩니다.
박정희와 스나이더 대사의 대화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진행되었고, 대화의 시점은 ‘명동사건’ 1년 후이자, 카터 행정부 집권 직후인 1977년 4월 초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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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스나이더가 나눈 대화의 전반적인 내용은 이렇습니다. 미국에 가 새 행정부의 수반 카터와 대화를 나누고 돌아온 스나이더 대사는 카터 행정부의 생각이 궁금했던 박정희에게 여러 의견을 전달합니다. 이때 화두가 되었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명동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18인의 석방입니다. 미국 행정부는 한국에 군사원조 예산을 집행하고, 주한미군 관련 방위공약 이행을 위해 미 의회와 여론의 지지가 필요했는데, 당시 미국 내에서는 유신체제의 인권 탄압 문제로 비난 여론이 아주 거센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카터 행정부는 한국정부에게 일종의 “상징적 조치”를 요구합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겁니다. “너네 군사원조 받고 싶지? 우리도 주고 싶어, 그런데 지금 우리도 현재 상황으론 해줄 수가 없어. 그러니까 니들이 인권 탄압을 하지 않는다는 제스쳐가 필요하고, 지금 가장 딱 맞는 가장 중요한 제스쳐가 바로 ‘명동사건’으로 인해 구속된 ‘김대중 포함 주요 민주화 인사들 석방’이야. 어때? 가능?”
박정희의 답은 뭐였을까요?
당연히, 예상 가능하게도, “그거는 절대 못해, 꺼져” 였습니다. 그러면서 김대중을 석방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매우 분노한 어조로 스나이더 대사에게 항변하죠. 그 반란분자는 절대로 그냥 풀어줄 수 없다고요. 이때 박정희가 흥분해서 말하는 내용을 보면, 박정희가 김대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민주주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아주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자, 길게 왔습니다. 바로 이 대화 내용 일부를 직접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박정희 각하의 적나라한 이야기를 들어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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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캡처는 면담록의 일부를 캡쳐한 것인데요, 잘 안보이는 부분도 있으니 주요 내용을 추려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이들을 지금 석방한다면, 당장 미국기자들이 김대중, 윤보선, 정일형 등의 집에 쫓아가 코멘트를 구할 것이고 이들은 마치 일제 때의 애국투사 인양 다시 정부를 공격하고 반정부 분자를 선동하는 행위를 할 것이다.”
“현 단계에서 우리 국민의 절대다수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은 가장 우선적으로 전쟁이 재발하는 것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국민이 단결하여 조국의 공산화를 막자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온 국민이 바라는 것이요, 또 미국도 이를 바라는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그것을 위해 우리가 합법적으로 필요한 조치를 취하고, 또 합법적 절차를 밟아 이를 집행하고 있는 것인데, 이렇게 법대로 하는데도 관용을 베풀어 달라, 그렇지 않으면 미국의 공약을 지키는데 지장이 있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김대중을 내일 석방한다고 하면 그는 당장 나가서 소위 민주회복을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공언할 것이고 반정부 분자들에 의해 영웅시되어 다시 정부에 반대하는 학생, 종교계 인사들을 선동하여 혼란을 야기시킬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정치적 목적만 달성되면 나라는 망해도 좋다는 생각이다. 지금 주한미상군의 철수문제로 떠들썩한 이 때에 학생이 데모를 하고 반정부 분자가 움직임을 보이면 당장 외신은 한국의 정정이 불안하다고 보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외국 사람들도 불안감을 가져 우리와의 경제협력이나 통상을 꺼리게 될 것이다. 또 국내 기업가도 불안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면 국가에 도움이 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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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가요? 각하의 생각이 읽히시나요?
위에 소개한 짧막한 박정희의 발언에는 꽤 많은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생각, 유신체제에 대한 신념, 김대중에 대한 분노와 증오,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그의 생각 등등.
민주화운동을 바라보는 박정희의 시각은, 유신 그 자체였던 그 뿐만 아니라 유신체제를 지탱한 수많은 위정자들과 군인들이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공유는 당시의 자료에서 아주 쉽게 여러 곳에서 읽힙니다. 민주화운동을 갈망한, ‘정상적인’ 보다 나은 사회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행위를 ‘유신세력’은 반정부 분자들의 반정부 행위, 반국가 행위로 인식했습니다. 유신은 말 그대로 국가를 위한 ‘합법적’인 체제로서 정당하고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유신’은 ‘반정부 분자’들을 때려잡아야 할 사회의 악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유신의 후예는 이러한 사고 틀을 그대로 내재화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사회와 1980년 5월 광주를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렇게 그들의 아버지가 증오해마지 않았던 김대중에게 내란선동죄로 사형을 선고합니다.
‘3·1절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1978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후 찍은 가족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