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웅현 — 인생은 공책이다
인생은
공책이다
자존, 극복, 선택 — 그리고 정답 없는 세상에서
자기만의 별을 그리는 법에 대하여
알을 깨고 나오는 공포
박웅현은 《여덟 단어》라는 책에서 자존, 본질, 고전, 견, 현재, 소통, 권위, 인생 — 여덟 개의 단어를 골랐다. 그중 하나만 꼽으라면 첫 번째, 자존이라고 했다. 오늘의 강연은 그 단어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그는 데미안 이야기로 시작한다. 중학교 때 자랑하려고 읽었고, 대학교 때 제대로 읽으려고 읽었고, 50대 초반에 다시 읽었을 때 완전히 파괴됐다고 했다. 수많은 성장 소설이 있지만, 데미안은 성장 소설의 이데아 같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극복해내요. 아버지를 극복해내요. 신부를 극복해내요. 저는 성장이라는 건 극복이라고 봐요.
— 박웅현, 데미안의 핵심을 요약하며알을 깨고 나온다는 것은 공포다. 아버지라는 보호망, 신부님의 권위라는 보호망, 누군가의 "내 말만 따라오면 괜찮을 거야"라는 보호망. 그 안에 머무르면 편안하다. 하지만 그 편안함 속에서 자기 삶은 시작되지 않는다.
데미안의 첫 줄. 나로부터 솟아나오는 것, 나는 그것을 살아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이 왜 그리 힘들었던 것인가. 박웅현은 이 세 줄에 공감한다고 했다. 딸에게도 이 이야기를 해주고 싶었다고. 세상 어디에도 답은 없다. 니 답을 찾아라.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가 극복해야 하는 대상은 세 겹이다. 첫째, 존경하는 친구 데미안. 둘째, 아버지의 세계. 셋째, 신부의 권위. 헤세가 동일한 구조를 《싯다르타》에도 적용한다는 점을 박웅현은 짚는다 — 부처의 득도 역시 극복의 과정이다. 스승을 버리고, 쾌락을 버리고, 고행을 버리고, 마지막으로 부처 자신의 가르침마저 극복한다.
고정 변수를 직시하라
박웅현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는 고정 변수에 잡혀 있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못 박혀 있다. 31살이라는 나이. 여자라는 성별. 아버지가 30억을 물려주지 않았다는 사실. 조인성처럼 생기지 않았다는 현실. 이것은 다 바꿀 수 없는 고정 변수다.
김훈의 문장을 인용한다.
항해술의 시작은
선박의 자기 위치 파악이다.
여러분 지금 어디 계세요. 이걸 먼저 물어봐야 한다. 나의 과오, 후회, 떨어진 대학, 헤어진 연인, 이불킥하는 실수 — 전부 포함해서 고정 변수다. 이것을 직시하지 않으면 항해를 시작할 수 없다.
이번 생은 망했어, 다음 생에 잘 살 거야 — 이 말은 위험해요. 페넌트레이스에서 이번 경기를 패전 처리하자는 것과 같아요. 이번 생이 망했으면 한마디로, 망한 겁니다.
— 박웅현, '이생망'에 대해그래서 이번 생은 절대 망하면 안 된다. 나의 수많은 실수를 포함해서 절대. 그리고 남의 게임이 아니라 내 게임을 해야 한다.
메시처럼 흘러가라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메시가 크로아티아전에서 보여준 움직임을 박웅현은 이렇게 표현했다. 고체가 아니라 액체. 흘러다니는 것처럼 흘러다니더라.
축구 선수는 매 경기를 예측할 수 없고, 매 경기 실수를 한다. 메시도, 손흥민도. 중요한 것은 그 실수에 묶이지 않는 것이다. 빨리 잊고, 다음 공에 집중하는 것이다.
인생은 계획표대로 되어가는 것이 아니에요. 내가 간절히 원하면 온 우주가 여러분을 도와줄까요? 우주는 여러분한테 관심 없어요.
계획을 세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긍정적인 노력은 다 해야 한다. 다만 내 노력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해야 한다. 코로나가 2020년에 그렇게 올 줄 몰랐듯이, 내년 4월에 은인이 나타날지 7월에 새로운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잘 흘러가야 한다. 물살이 언제 세질지 알 수 없으니까.
박웅현이 TBWA에서 경쟁 PT를 준비할 때도 같은 원리가 작동한다. 아이디어 5개, 10개가 나오면 정답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하나를 선택하고, 기를 쓰고 정답으로 만든다. 현대건설 '생활의 중심' 캠페인은 PT 기간 한 달 중 일주일 만에 "책을 만들어 가자"고 판단을 내렸다. 300억 규모의 PT. 나머지 아이디어를 전부 놓고 책에 집중했다. 살이 떨렸지만, 선택한 것을 정답으로 만드는 과정이 시작됐다.
엄마 친구 아들은
법적으로 금지시켜야 한다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말은 벌써 점을 바깥에 찍는 것이다. 저 사람처럼 되어보라는 것이다. 데미안의 이야기와 정확히 반대다. 싱클레어한테 "너는 데미안처럼 되어봐"라고 하면, 그 사람은 데미안의 짝퉁이다. 싱클레어가 없어진다.
그리고 이 비교는 언제나 비겁하다. 엄마 친구 아들의 가장 좋은 점 하나를 뽑아서, 나의 가장 후진 상태와 비교한다.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가장 큰 문제라고 그는 본다. 청소년 자살률이 높은 이유가 여기 있다고.
장미는 장미라서 예쁘고
찔레꽃은 찔레꽃이라서 예쁩니다.
서도호와의 인터뷰를 소개한다. 서울대 미대와 예일대 미대를 모두 다닌 설치미술가. 두 교육기관의 차이를 물었더니 이렇게 답했다. 서울대에서는 교수님이 뒤에 오셔서 지도해주신다 — 여기 빛의 각도를 살짝 눌러주고. 예일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 넌 뭘 그리고 싶어? 왜 그걸 그리고 싶어?
바깥에서 안으로 넣어주는 교육과, 안에서 밖으로 뽑아내는 교육의 차이. 스티브 잡스가 말한 창의성의 정의도 같은 맥락이다.
창의성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써 무언가를 이루는 것이다.
— 스티브 잡스 (박웅현 재인용)들꽃들입니다
박웅현은 TBWA에서 '망치'라는 프로젝트를 운영해왔다. 대학생들이 500명 앞에서 7분 동안 자기 이야기를 하는 스피치 프로젝트. 처음에 학생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한다. "저는 할 이야기가 없어요."
파고 들어가면 이야기가 나온다. 패배에 대한 이야기. 성공에 대한 이야기는 자기가 할 게 없으니까. 아버지를 교통사고로 잃은 학생. 10년간 랩을 했지만 재능이 부족하다는 걸 깨달은 학생. 중학교 때 세 명에게 학폭을 당한 여학생 — 7년간 가해자의 인스타를 들여다보며 놓지 못하다가, 발표 후 처음으로 보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이 프로젝트의 서문 제목을 '들꽃'으로 잡았다. 헤밍웨이의 말로 시작한다.
제대로 쓰이기만 한다면,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하나의 소설감이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박웅현 재인용)환영합니다. 꽃밭에 들어서셨습니다. 들꽃들입니다. 가꾸어지고 다듬어진 정원의 꽃들이 아닙니다. 제멋대로 자라고, 아직 덜 자라고, 자라다 꺾이고, 꺾여도 또 자라는 그런 것들입니다.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야단을 많이 맞고 자란 꽃들입니다.
장미는 장미라서 예쁘고, 찔레꽃은 찔레꽃이라서 예쁘다는 당연한 말이 우리 사회의 가장 절실한 말이 된 이유. 우리나라는 장미꽃만 꽃이라 하고, 그 장미마저 색깔별로 줄을 세운다. 100명 중 스카이에 들어가는 두세 명을 빼면 나머지는 의미 없는 인생인가?
상계백병원의 이동우 박사(한국정신건강의학회 학회장)는 망치 스피치를 거의 빠짐없이 참관했다. 그의 말 — "이 행사가 잘 되면 우리 거 필요 없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치유가 되는 겁니다."
선택한 다음에
정답으로 만드는 것
강연에서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은 이런 종류다. 유학을 갈까요 말까요? 이직을 해야 할까요? 결혼을 해야 할까요? 이것은 본질적으로 "3년 후에 내 인생 페이지에는 무엇이 쓰여 있을까요?"라는 질문과 같다.
박웅현의 대답. 확실한 사실 하나. 그 페이지에는 아무것도 안 쓰여 있다.
인생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정답으로 만들어가는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그걸 정답으로 만들어내고, 어리석은 사람들은 선택한 다음에 후회하면서 오답으로 만들죠.
그는 문 두 개의 비유를 든다. 앞문과 뒷문. 유학과 취업. 결혼과 비혼. 어떻게든 하나를 고른다. 고른 다음이 중요하다. 뒷문을 골랐으면, 앞문은 문이 아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앞에 있는 유일한 문은 이것이었어. 스티브 잡스는 이것을 '주관의 자기 왜곡장'이라 불렀다.
박웅현 본인이 그랬다. 신문사 떨어졌다. 방송국 떨어졌다. 삼지망이었던 광고회사에 왔다. 처음에 행복하지 않았다. 신문 기자나 PD는 사회에 올바른 메시지를 던지는데, 광고는 소비를 조장한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광고에 가치를 담을 수 없을까.
이 카피들이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에, 삼지망이었던 광고인 박웅현이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차선을 선택한 다음, 기를 쓰고 정답으로 만든 결과물이다.
의미 없어 보이는 점들이
별이 된다
《여덟 단어》에 이런 문장이 있다. 열심히 살다 보면 인생에 어떤 점들이 뿌려질 것이고, 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어느 순간 연결되어 별이 된다. 스티브 잡스의 'connecting the dots'와 같은 이야기다.
오늘 내가 본 영화, 오늘 나눈 대화, 오늘 맺은 인연 — 다 의미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다. 좋은 미래를 준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오늘을 충실히 사는 것이다.
박영석 대장의 안나푸르나 이야기를 인용한다. 마지막 캠프에서 정상을 올려다보면 포기하게 된다. 그래서 터득한 방법이 있다 — 정상을 보지 않는다. 1m 앞만 본다. 힘들게 1m를 가고, 확 내려가고 싶어지면 1m만 더 보고 판단하자. 이것이 안나푸르나를 오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충실한 하루만큼
훌륭한 미래 준비는 없다.
나폴레옹의 말을 인용한다. "내가 지금 겪고 있는 이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결과다." 잔인하지만, 그대로 미래로 적용된다. 오늘 긍정적인 점들을 쌓으면, 5년 후에는 더 좋은 곳에 가 있지 않겠는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닿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이다
Q&A에서 불안에 대한 질문이 나왔다. 박웅현의 답 — 불안할 때 불안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불안해봐야 자기를 누르는 거다. 불안한 시간에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대학 시절, 도서관에서 4천 명 중 2천 명이 동아상식백과를 펼치고 언론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박웅현은 그 책을 보고 있는 게 짜증이 나서 안 했다. 대신 안나 카레니나를 읽었다. 그래서 시험에 떨어졌다. 불안했지만, 자기가 동의하지 않는 것은 하지 않았다.
갈등이 있을 때의 철학도 전한다. 한 손에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를, 다른 손에는 박목월의 시 한 구절을 가지고 가라고.
지나간 곳은 지나온 것이요, 닿지 않는 것은 닿지 않는 것이다.
— 박목월최선을 다하되, 닿지 않는 사람과 일과 인연은 놓아주라는 것이다. 불굴의 의지만 가지고 가면 번아웃이 오거나 영혼이 다친다. 두 개를 양 손에 쥐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일의 의미에 대한 질문에는 명쾌했다. 일의 의미는 통장이다. 먹고 살라고 하는 것이다. 워라벨이라는 말에 의문을 품는다 — 워크와 라이프가 어떻게 동급인가. 일은 수단이고, 삶을 꾸려나가기 위한 생계다. 다만 그 생업에서 자라지 않으면 숫자가 줄어드니, 잘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사 노동이든 어떤 노동이든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행복임을 알아야 한다고 했다. 세월호 부모님들이 가장 힘들어한 말이 "다녀왔습니다"였다는 이야기를 꺼내며 — 박탈당하고 나서야 가장 그리워할 것들이 지금 일상 속에 있다고.
내 마음속에
올바른 재판관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 존재와 상의하면서
선택을 해나가시면 됩니다.
이 글은 2022년 12월 23일에 진행된 박웅현의 강연(69분)을 재구성한 아티클입니다.
음성 스크립트의 구어적 반복을 정리하고, 주요 인용의 맥락을 보충하며
강연의 서사 구조를 8개의 챕터로 재편했습니다.
"모든 멘토를 참고사항으로 삼으라. 이 책을 참고하고 당신의 길을 가라." — 박웅현, 《여덟 단어》 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