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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아닙니다만

essay drive
작성자
디노
작성일
2025-09-29 08:07
조회
122
한때 곡식이 가득했다. 글을 쓰고, 사진을 찍는 일은 그 자체로 수확의 행위였다. 새벽에 문장을 붙잡고 씨름하거나,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장면을 카메라에 담아두고, 생각날 때마다 곳간에다 던져두었다. 언젠가 쓸 일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채로 말이다. 정리되지 않으나 혹은 정리하고 시간순 혹은 인스타, 블로그에 업로드할 순서로 정리해 둔 채로 쌓아두었다. 비록 마음에 들지는 않더라도, 내 것이었기에 수가 많아지고 다양해질수록 풍족하게 느껴졌다. 그런 아이들을 하나씩 꺼내어 혼자 보고 만족하거나, 드넓은 웹 속에 한 자리를 차지한다. ♥를 받기 위함이 없다면 거짓말이지만 인스타그램이나 블로그를 포트폴리오라고 생각해서다. 어디다 제출하거나 공모하기 위함이 아닌 오롯이 자기만족의 목적으로 말이다. 그렇게 쌓인 피드나 게시물 목록을 볼 때 목적은 달성한다.

하지만 요즘은 곳간이 비어가는 것 같다. 예전처럼 자주 곡식을 모으지 못한다. 꺼내 쓸 것도 줄어들고, 당장 내일이라도 바닥을 드러낼 것 같은 불안이 마음에 들어앉는다. 글을 쓰는 일이 권태 로 다가오고, 사진을 찍는 일도 예전만큼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지 않고, 셔터를 눌러도 그 순간이 무겁게만 다가온다. 뿌듯함과는 별개로 내용의 퀄리티의 발전이 더디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으로 목적 달성은 좋은 일이지만, 결국 타인과 비교하게 된다. 아닌 척하지만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나도 모르게 땅속 깊숙한 곳의 마그마처럼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렇다고 멈추지는 않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 사진을 찍는 이유가 단순히 즐겁기 때문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건 내 삶의 습관이고,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식이다. 무엇보다 과정이 즐겁다. 한 줄의 글을 쓸 때,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조작하거나 한 발 더 다가가는 등의 행위를 할 때가 즐겁고 행복하다. 그 순간만큼은 다른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 행복 하나가 한 주를 버틸 힘을 준다.

올해는 유난히 여행을 많이 갔다. 하노이, 도쿄, 런던, 휴양림, 템플스테이, 여행으로서의 부산, 예정된 도쿄까지. 30살까지 여행한 것보다 많다. 새로운 풍경과 낯선 거리를 걷는 일은 단순히 현실을 잊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텅 비어버린 마음을 어떻게든 채우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비어 있는 곳간에 메아리처럼 울림만 가득할 때, 여행은 그 울림을 잠시 멈추게 해주었다. 낯선 도시의 빛과 그림자, 전혀 모르는 사람들의 표정, 처음 발자국을 내디딘 곳의 공기와 냄새들이 내면으로 스며들어와 새로운 자루 하나를 채워주었다. 여행은 수확이 아니라 씨앗을 가져오는 일이었고, 그 씨앗이 언젠가는 다시 채울 거라는 희망이 되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건 욕심일지도 모른다고. 더 좋은 문장, 더 나은 사진, 더 특별한 결과를 원하면서, 이미 가진 곡식의 무게를 잊은 게 아닐까. 내 곳간은 늘 비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지도 모른다. 곡식이 부족한 게 아니라, 내가 풍족함을 잊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이디어, 창의력은 한 번 쌓아두면 영원히 유지되는 저장장치가 아니다. 그건 계절마다 수확되는 농작물과 같다. 봄에는 씨앗을 뿌리고, 여름에는 뜨거운 햇볕과 폭우를 견딘 후 가을이 되면 수확의 결실을 본다. 그리고 겨울이 찾아오면 곳간은 비어 보인다. 그러나 빈자리는 새로운 시작을, 새로운 것들로 채울 기회를 제공한다.

곳간이 비어 있다고 느껴지는 지금은, 어쩌면 씨앗을 심을 때일지도 모른다. 글이 잘 써지지 않아도,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 과정이 땅을 고르고 씨앗을 흙 속에 묻는 일일 것이다. 이런 일들이 쌓여 몇 번의 계절이 바뀐 후에 곡식을 거두는 밑거름이 된다. 창작이란 결국 매번 새로운 씨앗을 심는 일이고, 그 결과는 곳간이 아니라 내 손과 발자국에 남는다.

나는 여전히 곳간 문을 연다. 오늘은 비어 있어도 괜찮다. 내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빈자리에서 다시 무언가로 시작 될 수 있다는 희망이 있다. 글과 사진, 그 모든 시도는 결국 곳간을 드나드는 내 발자국의 기록일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지금의 권태와 공허함조차도 또 하나의 자루가 되어 곳간 어딘가에 놓여있을 것이다. 그것을 꺼내어 다시 바라보는 날,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곳간은 비어 있는 적이 없었단다. 네가 미처 보지 못했을 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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