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향이 은은하게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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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듯 없는 듯, 필요에 의해 찾았고 필요가 사라지면 버려졌다. 아니 버려졌다기보다 원래대로 돌아간 것이 맞겠지? 관심 주는 있었다. 내가 원하는 방식과 영역까지 들어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들어가지 못한 나를 책망했다.

매거진 B 한남에서 향긋한 아라비카 커피 한잔하며, 브랜드 토크쇼를 들었다. 일본에서 대학을 나오고 직장생활을 한 그녀에게 아라비카 커피의 경험담을 들으며 근처 맥줏집으로 향했다. 각자 한 잔과 감자튀김을 시켰다. 3월이지만 아직 추운 날씨라 창문을 닫았다. 닫고 싶지는 않았다. 신남이 묻은 옆 테이블의 대화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지 않길 원했다. 바깥의 소음과 그들의 재잘거림이 섞여 중화되길 바랐다. 별수 없었다. 우리가 조금 더 가까이하는 수밖에.

이전에는 제대로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외모에서 풍기는 모습과 입에서 전해지는 경험은 나와는 다른 사람. 겹칠 수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물과 기름처럼. 겹치지도 섞이지도 않는.

맥주의 힘이었을까? 짧은 시간 동안 별의 별 이야기를 다 한 것 같다. 서로의 취향부터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과거의 이야기까지. 그럴 수 있었던 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공감하고, 나 또한 그녀의 이야기가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함께 여행을 다녀오기 전 벚꽃이 피던 봄날 그녀는 교토에 다녀왔다. 선물로 위켄더스 커피의 원두 한 봉지를 가져다주었다. 20그램을 담아 그라인더에 분쇄하고 94도로 맞춘 뜨거운 물에 커피를 내렸다. 향긋한 커피 향이 방안을 채우며 2분의 시간을 기다린 후 한 모금. 조금은 묵직하면서 고소한 커피 향이 입안을 맴돌면서 생일날 전해준 엽서의 글귀를 읽어 본다. 몇 줄의 짧은 편지지만 그 어떤 말보다 힘이 되고 감동을 주는 글이다. 지금도 필수 EDC[1]인 파우치에 넣어두고 힘들 때 꺼내어 본다.

 

10월의 교토 여행의 마지막 날 아침 그 위켄더스 커피숍을 갔다. 주차장 구석에 조그맣게 자리한 카페였다. 테이블도 없이 카페 앞 공간에 앉아 주문한 커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유명 카페다 보니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아침부터 향긋한 커피를 맛보기 위해 방문하고 조용히 커피와 공간을 즐긴다. 선물 받은 원두의 원산지(?)에서 커피를 마시다니. 그녀 덕분에 멋진 경험을 한다.

 

그녀나 나나 특별한 사람은 아니다. (아니다 그녀는 매우 특별하다.) 튀지 않지만 각자 독특한 개성과 취향이 서로에게 긍정적인 자극이 되며 일상에서 조금씩 스며들어갔다. 여전히 자기 비하가 심하고 자존감이 낮은 내게 큰 힘이 되어주고, 오늘을 열심히, 내일을 기대하게 만드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이 때로는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즐겁지만 덕분에 조금씩 변화하는 내가 좋아지기도 한다.

커피로 시작된 관계는 각자의 향기가 서로에게 스며들어 필수 요소가 되어간다. 지금의 내게 그녀의 존재는 멈춤 보다 전진하게 만든다. 앞으로 나가는 것, 그동안 원했던 것이었다. 때로는 속도가 방향이 중요할 수 있지만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소년도 청년도 아닌 중년이 되어가는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전진이다. 소년 때도 청년 때도 하지 못했던 것이 전진이다.

평일인 오늘, 오랜만에 커피를 내려 마신다. 함께 간 카페에서 첫 향에 반해버려 구매한 원두를 고른다. 과일 향이 코끝을 스치며, 퇴근 후의 시간을 아름답게 만든다. 오늘은 유튜브, 음악보다는 커피에 오감을 집중시킨다. 설거지는 내일로 미루고… 이러면 혼나는데…

[1] Every Day Carry : 대충 맨날 들고 다니는 물건이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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