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커피를 좋아하고 에스프레소를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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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후 흐리고 무거운 공기로 가득하 버스터미널은 매우 생경했다. 이곳에서 펼쳐질 일상의 기대나 두려움보다 어색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다른 억양의 언어로 가득함도 한 몫했다.

 

그때의 첫 발걸음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도 신기하다. 도전과는 거리가 먼 소심했던 내가 친구라고는 달랑 하나 있던 이 큰 도시에 지금까지 살아있다니. 비슷한 시기에 이 곳에 입성했던 지인들은 갑감함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돌아갔다. 내가 이 곳에서 버텨낼 수 있었던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지금도 마찬가지로 별다른 욕구가 없었음에도

 

휴일이면 탄천과 분당중앙공원을 산책하며 이곳의 계절을 즐겼다. 가끔은 빨간 버스를 타고 종로에 내려 교보문고에서 책 구경을 하고 광화문 광장에 앉아 높은 건물과 궁궐을 보며 이 곳에서 아무생각없이 혹은 내가 할 일은 무엇일까 고민하고는 했다.

 

산책과 무념무상의 행위는 배고픔 보다 목마름이 먼저 다가왔다. 첫 카페의 주문은 기억속에 생생히 남아있다. 한 번도 커피를 직접 주문해서 마신 적이 없었다. 대망의 첫 커피 주문 장소는 서현역 근처 던킨도너츠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메뉴판의 첫 번째 품목을 주문했다.

 

“에스프레소 한잔 주세요.”  / “정말 에스프레소 맞으신가요?”

 

주문을 받던 직원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주문하는 나를 간파했는지 되물었고, 그제야 ‘보통’사람이 마시는 커피,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수 있었다. 커피의 맛은 기억나지 않는다. 첫 주문의 당황+황당함이 인상깊었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 후로 던킨도너츠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았기 때문일까?

 

부끄러웠던 첫 경험 때문에 꽤 오랫동안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았다. 커피는 낯선 곳에서 뛰어넘어야 할 또 하나의 미션이었다.

 

추석 연휴 전 주말 집에서 커피를 내려 마셨다. 원두는 3가지가 있었고 모두 구매한지 시간 흘러 풍미는 많이 사라져 있었다. 한 번에 30g, 아침 저녁 두 잔 마셨다. 버리기는 아까우니까.

 

추석 전날 친구들을 만나기로 했으나 다른 녀석들과는 일정이 맞지 않아 결국 가장 자주보는 친구와 집 근처로 약속을 잡았다. 초기 계획이 틀어져. 급하게 전포동으로 향했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던 모교 근처에 있는 베르크로스터스에 가서 브라질 산 싱글오리진 원두 250g과 에스프레소 한 잔을 주문했다.

 

지금은 커피의 향을 즐길 줄 알고, 다양한 원산지의 원두를 즐기며, 작은 잔에 담긴 에스프레소를 즐길 줄 안다. 씁쓸하지만 그 속에 풍기는 산미와 과일 향은 입안 가득히 메우는 메력은 마력같다. 다른 원두로 두 잔 주문할 걸 그랬나? 필터 커피를 마셔볼 걸 그랬나? 유명한 곳은 다 이유가 있구나.

 

집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카페 일정이 잡혔다. 예전에도 여자친구에게 좋았던 경험을 전해 들었던 봉천동의 한 카페. 커피도 맛있고 디저트도 맛있는 곳이라 했다. 위치는 정말 생뚱맞은 곳이라는 얘기를 몇 번 들어서 커피 맛보다 그곳의 풍경이 궁금했다.

 

다세대 주택이 밀집한 골목의 입구, 빌라 1층이었고 맞은 편에는 ‘철거’라는 글자가 강렬하게 적힌 폐가가 줄지어 서 있고, 카페 앞에는 2팀의 대기자가 있었다.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길래,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데도 기다리면서까지 이 곳을 즐기려고 하는 걸까? 기다리는 동안 궁금증만 더해갔다.

 

손님이 나가고 대기자가 들어가는 순간 카페의 문이 열리면서 그 틈을 타고 풍기는 커피 향이 내 코끝에 닿았다. 향이 심상치가 않았다. 궁금함은 기대모드 전환되었고, 기다림 끝에 입성한 카페의 내부는 넓진 않지만, 많은 이들로 가득한 만큼 향긋한 커피 향이 나머지를 채우고 있었다.

 

배고팠기에 케이크 2종류와 커피를 주문했다. 그동안의 경험과 각 원두의 특성이 잘 안내된 덕분에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주문 즉시 원두를 갈고 직접 커피를 내려 주신다. 그동안 이 공간의 모습을 눈에 담는다. 아늑하다. 테이블 가득한 사람들도 이 카페의 분위기에 젖어 들었는지 오롯이 커피를 음미하거나 작은 목소리로 타인의 세계를 침범하지 않는다. 덕분에 커피의 향 만을 허락할 수 있었다.

 

내가 선택한 원두는 포도, 복숭아, 건과일의 컵 노트가 표기된 콜롬비아 산이다. 포도… 포도?? 도대체 커피에서 포도 향이 난다고? 의심하며 들이킨 첫 모금, 산뜻한 산미 뒤에 폭풍처럼 다가오는 포도 향은 충격적이었다. 화사한 꽃향기의 경험은 많았지만, 강렬한 포도 향은 처음이었으니. 마치 마이구미를 갈아 넣은 듯했다. 그 후 잔잔한 고소함으로 마무리되는 커피 한잔. 환상적이다.

 

약간의 불편함과 기다림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는 커피였다. 단돈 몇 천 원에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커피의 가장 큰 매력이고, 그 매력을 알고 즐길 수 있다는 것에 행복을 느낀다.

 

문득 15년 전 지인의 가게에서 마셨던 첫 커피가 떠올랐다. 눈앞에서 원두 갈아 내려주신 커피는 황홀했다. 맛있는 커피를 마실 때면 종종 그때 생각이 난다. 그리고 첫 커피 주문의 어리바리 했던 모습도 떠오른다.

 

이제는 커피를 사랑하고 에스프레소를 즐기며, 집에서도 직접 내려 마신다. 익숙해진 커피만큼 이곳의 삶과 일상도 익숙해졌다. 오히려 이 도시를 누구보다 잘 즐기고 활용한다. 떠나오지 않았으면 알지 못했던 세상을 알게 해 준 15년 전의 내게 감사함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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