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어를 보고 떠올리는 느낌은 현재의 감정상태에 따라 극명하게 갈린다. 나에게 한강은 안식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인지하고 있지만 표면으로 잘 꺼내지 않는 것 중에 하나는 ‘자살’이 있다. 작년 기사 기준, 무려 하루에 1명 꼴로 스스로 삶을 종료 시키기 위해 뛰어내린다고 한다. 그러한 한강의 많은 이미지 중의 하나인 ‘자살’을 소재로 한 제2한강. 나의 호기심을 불러이르키는 소재라 구매 후 하루 만에 다 읽어 버렸다.
제2한강은 자살한 사람들이 진정한 죽음(작중에는 소멸이라고 한다)전에 이르게 되는 세상이다. 마치 한강처럼 생긴 강과 그 일대를 그들의 삶의 터전으로 삶고 있는데 그래서 제2한강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정식 명칭은 아닌듯.
제2한강은 푸른 빛의 세상으로 풍경, 음식 모든 것이 푸르다. 죽은 사람 특히 자살한 사람들의 세계다 보니 인간의 ‘온기’가 빠져서 그런게 아닐까? 이 곳에서의 소비 생활은 모두 무료다. 집도 공짜, 법도 공짜, 군것질, 이동수단 모든 것이 공짜이며, 유실물보관소를 통해 나의 현생에 가지고 있었던 물건도 다시 받을 수 있다. 강변에 나가면 똑같이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이 있고 강에는 수상택시 그리고 지상선로를 다니는 순환열차도 있다. 다리는 총 3개로 아침, 점심, 저녁 대교라 불리며 각각의 다리에서는 ‘다시 자살’을 신청받고 실행하는 곳이 있다.
‘다시 살자’는 무엇일까. 이미 자살을 한번 했으니 ‘다시’라는 말이 붙었다. ‘다시 자살’하기 위해서는 신청서를 내고 정해진 시간에 대교로 와 뛰어내리면 된다. 물에 닿는 순간 소멸해 버린다. 헌생의 죽음과 동일하다. 제2한강 세계를 기준으로 하면 소멸이지만 또 어떤 세상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렇든 제2한강에서 죽음은 ‘다시 살자’ 밖에 없고 고층 건물이나 손목을 그어도 죽지 않는다. 그렇기에 ‘다시 자살’을 하지 않으면 (아마도) 영원히 이곳에서 살 수 있다.
소설 ‘제2한강’에는 ‘자살’한 사람들이니 만큼 각기 다른 아픔을 간직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나는 그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내가 지금 느끼는 감정인 ‘외로움’이 그들의 삶에 큰 짐으로 짊어지고 었었다.
직상생활의 스트레스, 현생의 외로움, 사랑하는 사람의 ‘자살’을 견디지 못하고 자신도 ‘자살’한 사람, 타인의 가시돋힌 말(악플) 등 많은 이유가 있지만 내가 느낀 것은 외로움이었다. 그 누구도 나를 나로서 존중하고 배려하고 사랑해 주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때 ‘자살’을 하고 다들 제2한강으로 모이된 것이다.
하지만 제2한강의 등장인물들과 그들의 관계는 결코 ‘자살’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현생의 큰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일까 서로에게 조금더 편한 상태가 되어 서로에게 부족한 점을 채워주는 사람이었다.
그들의 현생의 이야기는 너무 슬프고 안타까웠지만 ‘제2한강’에서의 삶은 행복해 보였다. 그럼에도 출퇴근하는 버스, 지하철, 내 방안에서 이 책을 읽을 때 내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왜였을까. 현생의 힘든 나의 현실 그리고 자살을 했을 떄 ‘제2한강’같이 모든 것을 다 잊고 오롯이 욕심없는 나의 본 모습대로 살 수 있는 곳이 있지도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어서 일까? 결국 ‘제2한강’의 등장인물들도 ‘자살’에 의한 두번째 삶을 살아가고는 있지만 그 곳에는 자신 혼자 뿐이다. 현생에서 나를 구성하는 가족, 친구 들은 제2한강에는 없다. 그렇기에 ‘제2한강’에서의 삶을 다르게 살고 있는게 아닐까?
‘제2한강’은 나에게 공감과 감동을 주었고 나에게도 탈출구가 있다는 희망을 주었지만 그것은 허상이다. 내가 스스로를 정리하고 돌아갈 곳이 ‘제2한강’이라면 기꺼이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알 수 없다. 현실에서는 ‘소멸’하지만 이 후에는 어떠한 세상이 있을지는 모른다. 현실보다 더 고통스러울 수 있고 평온할 수 있다. 그렇기에 ‘자살’이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수십년 동안 끊임없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지금도 맴돌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힘들고 외롭다는 말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가시가 되어 나를 찌르고 피와 눈물을 흘리고 지치게 만든다. 이 모든 일을 견디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유가 과연 있을까? 왜 자살은 나쁜 것일까?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야 말로 숭고하고 생명을 가진 것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 아닐까?
‘제2한강’의 저자는 서문에서 스스로 세상을 떠난 자신의 지인을 생각하며 지었다고 했고 독자들에게 부디 같은 선택을 하지 말아달라고 당부한다. 그것이 진정한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인지도 모른체 작가 그리고 수 많은 사람들이 ‘개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을 하지 말아달라며 간곡히 부탁한다.
이슬이는 이제야 친구를 찾았다며 제2한강에서의 삶을 ‘다시 자살’을 통해 마감하고 소멸한다. 이슬이를 보며 한 인간으로서의 소멸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지금 내 삶의 의미는 이 레이스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때로는 정말 하찮게도 이딴 것에 묻어 있다.
오늘은 오늘 하루만큼의 점만 찍을 수 있다. 오늘의 걱정이 내일의 점을 대신 찍어 주지 못한다.
인생은 태어난 날부터 죽는 날까지 하나의 선으로 이어진 것 같아 보여도, 결국 하루라는 단위의 수많은 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내가 이 지경까지 오게 된 게 꼭 내가 못나서, 내가 멍청해서, 내가 바보 같이 생각하고 행동해서만은 아니란 걸 깨닫는 거지. 남들처럼 살려고 했는데 남들처럼 안 되는 것들이 있었고, 그중에서 몇몇은 따지고 보면 남들보다 훨씬 불리하기도 했고 말이야.”
내 손에는 물감도 붓도 없는데, 미래라는 크고 하얀 캔버스가 내 앞에 수백, 수천 장 까마득하게 펼쳐졌다.
화짜는 생각했다. 자신이 존재하지 않길 바라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많다고. 그런 사람들을 하나하나 찾아가 ‘저는 존재할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하고 설득할 수는 없으니, 그럴 바엔 차라리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것이 가장 최선이겠다고.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인생이었으면 죽어 놓고 후회도 안 해
“그런 걸 빼면 널 뭐라고 설명할 건데? 너 그냥 30대 직장인에 키는 대충 170 몇이고, 고향은 대한민국 어디 중 하나인 남자 A야? 그런 사람 대한민국에 백만 명도 넘을 걸.”
“이유 없는 증오는 그 이유를 증오의 대상에게서 찾을 수 없다는 뜻인 것 같다고. 이유가 나한테 있는 거지. 증오의 대상이 과거의 내 어떤 기억을 자극했거나, 그날따라 내 기분이 나빴다거나, 혹은 질투가 났거나. 그게 아니고서야 나한테 잘못한 것도 없는 사람을 그렇게까지 미워할 수 없을 것 같더라고.”
버려지지 않기 위한 노력은 결국 버려지는 이유가 되었다
저는 저를 지워 버리려고 자살한 게 아니거든요. 제 자신이 더 이상 고통받지 않게 지키고 싶었던 것뿐이지.”
아무리 한심하고 멍청한 모습이라도, 그 자체가 나 자신이었으니까요. 하나씩 버릴 때마다 나의 일부분이 잘려 나갈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결국 나라는 사람은 존재 자체가 사라지게 될 거란 생각이 들었죠.
그것은 나 자신에 대한 기대감을 낮추는 행위이기도 했다. 기대감은 인생에서 가장 거추장스러운 감정 중 하나다. 무엇을 기대한다는 것은 크든 작든 반드시 실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동반한다. 실망하는 것은 너무 아프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기대감을 버리면 인생이 따분해지지만, 적어도 안전함은 지킬 수 있다. 특히 나처럼 실망 한 번에 우르르 무너지게 되는 사람이라면 그 편이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