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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 독서법

essay drive
작성자
디노
작성일
2024-06-17 16:00
조회
924
에세이 드라이브 58기 네 번째 글

 

작은 글로 흔적을 남깁니다. 

  

퇴근길 9호선 열차 속은 락페스티벌의 슬램 존 보다 전투적이다. 입장부터 한치의 공간도 그냥 두지 않고 몸을 욱여넣어 자신만의 공간을 마련하며, 승리자가 된다. 그 결과는 10분가량 집에 일찍 도착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매번 이득을 보지는 못한다. 환승해야 하는 다음 열차나 버스의 타이밍이 어긋나버리거나, 유난히 신호에 많이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서성여야 할 수도 있다. 도로에서는 약간의 틈새를 공략할 수는 없다. 이건 10분이 아니라, 10년, 아니 30년은 먼저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지하철 속은 마치 전쟁터 같다. 조금이라도 안쪽으로 들어가기 위한 잠임 액션, 그 속에서 평온을 찾기 위해 헤드폰을 쓰고 눈을 감으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들. 가끔 이 세계 속의 한 명으로서 매일 반복되는 이 시간을 관찰한다. 대부분 스마트폰으로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소셜미디어의 콘텐츠에 빠져 혼란한 이 세계를 버틴다. 의도하지 않지만 약간 키가 큰 탓에 지나가는 눈길에 스치는 영상을 보면 누군가에게는 시간낭비일 수 있지만, 이 세계의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버팀목이 되어주기도 한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열차는 동작역에서 미세한 인구 소멸을 일으키고 다시 서쪽으로, 서쪽으로 향해 달린다. 앞으로 맨 백팩에서 작은 이북리더기를 꺼내어 본다.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인문, 과학 서적은 도통 눈에 늘어오지 않는다.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켜 어지럼증을 일으킬 수 있다. 가끔 만원 지하철에서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시민들의 소식을 듣는다. 만약 스마트폰처럼 생겼지만, 이상한 흑백 화면의 기기를 들고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184cm 키의 안경남을 발견한다면 건강 문제보다 어려운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임을 알려드린다. 응급조치도 좋지만, 지금 보고 있는 페이지를 해석을 해주면 큰 도움이 될 듯하다. 

지하철에서 119 대원분들을 만나고 싶지 않아 다른 책을 열어본다. 역시 이럴 때는 가벼운 소설이나 에세이가 좋다. 특히 주인공이 시련을 겪는다면 동변상련의 마음으로 읽게 된다.  

‘너도 힘드냐? 나도 힘들다’ 

한 페이지, 두 페이지 읽다 보면 어느새 내 옆에 공간이 생긴다. 노량진역이나 당산역을 지났기 때문이다. 1호선 감사합니다. 약간 공간이 생긴 탓에 긴장한 몸을 스트레칭 하며 다른 책을 열어 본다.  

 당산역 이후에 어지럼증을 호소하는 184cm 키의 안경남은 내가 아닐 것이다. 조금은 여유 있는 지하철 내부와 점점 집으로 가까워진다는 설렘이 커지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분을 발견하면 반드시 119에 신고해야 한다. 건강문제일 가능성이 높다. 

 외부 상황과 기분에 따라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는다. 완독에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한 번에 여러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묘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고, 새로운 통찰력을 얻을 기회를 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문득 밤하늘을 보니 초승달이 거리를 비춘다. 오늘 밤에는 몇 달 전 읽다만 코스모스를 펼쳐봐야지. 오늘 밤 꿈에는 우주를 날아다녔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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