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겨운 발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마주하니 새로 주문한 원두가 한쪽 구석에 ‘툭__’ 놓여있었다. 박스를 열고 포장을 뜯으니 ‘달콤블랜드’ 라는 이름답게 고소하고 향긋한, 아름다운 원두 향이 답답한 상자 속에서 탈출하듯, 빠르게 방안 곳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향에 하루 종일 밋밋했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행복하다.
아름다움은 풍경, 소리, 맛, 향기, 사람 등 다양한 옷을 입고 다가와 스며든다. 특별한 감동과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경험은 쉬이 기억 속에서 잊히지 않는다. 문득 아름다웠던 첫 경험의 장면들이 떠올랐다.
수백 개의 계단을 오르고 맞이한 성산일출봉의 정상에서의 풍경.
첫 콘서트였던 서태지 공연에서 온몸을 여러 번 휘감고 심장을 뒤흔들었던 거대한 사운드.
대학 시절 예비군 훈련을 마치고 친구, 형들과 방문한 고깃집에서 술기운을 ‘뿅~’하고 날려버린 된장라면. 지금은 사라진 ‘플레이톡’이라는 SNS로 알게 된 형님네 가게에서 마신 첫 드립커피, 원두를 갈고 드립을 하는 과정을 신기하게 바라보며 향에 취해있던 내 모습까지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아름다웠던 순간의 경험은 추억이 되어 일상과 함께한다.
육지와 다른 매력의 제주를 느끼기 위해 비행기에 오르고, 귓속 세상에서 맴도는 음악을 온몸으로 체득하기 위해 170여 회 공연을 즐겼고, 인생 음식을 찾기 위한 골목 탐험,
향긋하고 맛있는 커피를 위한 카페 탐방, 이것도 부족해 드리퍼, 온도 조절 기능의 전기주전자와 전자저울을 구매하고, 내 취향의 원두를 고른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일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사랑하는 것을 나만 간직하기에는 아깝다. 손끝으로 창조되는 글과 사진, 입으로 퍼지는 언어로 경험을 전하고 공유한다. 좋은 것만 좋아한다는 확신에 진심을 담겨 타인에게 전해진다.
고층빌딩, 수많은 차량과 사람들로 북적이는 도시에서도 아름다움을 찾는다. 파란 하늘, 붉은 노을, 누가 관심 가질까 싶은 거리의 화분에서 자신의 색을 뽐내는 꽃까지. 자세히 보아야 아름다운 것은 정작 아름다운 것들을 파괴하는 것들 밖에 있다.
오늘의 하늘, 노을, 꽃은 내일 존재하지 않는다. 충실한 오늘임을 추억하기 위해 분주히 시선을 옮기고 남들과 다른 방향으로 발걸음을 움직이고 때로는 멈춘다.
락 공연장의 스탠딩석보다 빼곡한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날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한다. 그때 마다 지난날의 추억으로 되살려 상쇄한다. 아름다운 풍경, 향긋한 냄새, 생각만 해도 침샘이 자극되는 음식을 생각한다.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내가 지킨다.
새로운 커피의 향과 맛을 기대하고 설레는 마음으로 장비를 주섬주섬 꺼낸다. 오늘의 마무리는 예쁜 컵에 담은 커피 한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