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가문31) 그리고 생명의 물
THE CLANS AND USQUEBAUGH
그림 12 스코틀랜드 타탄 |
이러한 풍경에서 유구한 스코틀랜드의 위대함이 태어나고
그 풍경은 조국에서 사랑받고 해외에서 숭배 받는다.
“오두막집의 토요일 밤,”32) 로버트 번즈
스코틀랜드 왕국
생존마저 불확실할 정도로 혹독한 겨울의 삶을 상상해 보라. 지형은 바위투성이여서 단거리 여행마저도 며칠씩이나 걸린다. 소를 강탈하고 마을 전체를 파괴하는 강도떼들에게 취약하기 그지없는 집. 수 세기에 걸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거친 지형, 서로 싸우는 가문, 영국의 침략 그리고 그들의 문화를 파괴하려는 조직적인 시도들을 감내해야만 했다. 그들의 민족성을 격렬한 독립성과 생존 의지로 특징 짓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 불확실한 생활 속에서, 영속성은 소중하게 여겨졌다. 손으로 짠 타탄의 따뜻함, 길고 추운 여행이나 전투 시에 몸을 유지할 수 있는 위스키 제조 비법,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문 공동체의 보호와 결속.
이러한 뿌리에서 스코틀랜드의 독특한 문화유산이 자랐다. 헌법적으로 영국33)에 묶여 있지만, 스코틀랜드는 독립된 사법 구조, 교육 제도, 화폐, 국가 문장, 게일어 그리고 하일랜드 게임과 같은 특징을 가진 고대 스포츠들을 간직하고 있다.
1603년 까지, 스코틀랜드는 스스로의 군주와 의회를 가진 주권국가였지만, 그 해에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제임스 1세34)로 즉위한 후, 그는 두 나라를 합체하여 현재의 정부 체제의 기초를 형성하였지만, 완전한 연방은 100년 후까지도 달성하지 못했다.
최근 들어, 스코틀랜드는 정책결정에 있어서의 발언권부터 연합왕국으로부터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많은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가문
그림 13 스코틀랜드 국가문장. 라틴어 표어. “나를 건드리는 자~” 위에 엉겅퀴꽃이 있다. |
이러한 민족 주체성과 독립 정신은 고대 가문 제도에서 필수적인 아주 견고한 혈연적 연대와 충성심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문35)이란 원래 어린이를 의미하였다. 가문은 동일 조상, 혈연, 그리고 동일지역에 살았던 가문의 성을 공유하는 공동체였다. 그 중에서 맥그리거, 브루스, 캠벨, 맥도널드 그리고 스튜어트 등의 가문은 스코틀랜드 역사에 이름을 남기었다. 각각의 가문 구성원은, 가장 약한 가문 구성원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기를 서약한 그들의 수장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스코틀랜드의 역사는 용감히 잉글랜드와 싸우기 위해 단결하는 가문의 영웅담으로 가득하다. 사실, 가문들은 침략자뿐만 아니라 가문들끼리도 싸웠기 때문에, 서로를 구분하기 위하여 타탄과 문장은 중요하였다.
“가문들은 서로 죽기 살기로 싸웠습니다.” 스코틀랜드 최고의 퀄트 제조회사, 에딘버러에 위치한 킨록 앤더슨의 전직 임원이었던 해리 린들리는 설명한다. “소나 양을 훔쳤다고 해서 많은 반목과 불화가 있었습니다.”
가문들은 전통적으로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하여 자기 땅에서 나는 관목, 신성시되는 식물과 꽃 등을 문장으로 삼았다. 예를 든다면, 브루스 가문은 로즈마리, 해밀턴 가문은 월계수 잎 그리고 매터슨 가문은 꽃잎이 4장인 장미꽃, 이런 식이다. 모직 모자챙에 부착하거나 휘장으로 팔 둘레에 매곤 했다. 어떤 식물은 약용 성분을 가지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는 특정 가문이 거주하는 지역 내에서 널리 자생하기 때문에 문장으로 선정되었다.
스코틀랜드 국화, 엉겅퀴는 1470년 은화에 처음 모습을 나타냈다. 침략자 바이킹이 엉겅퀴를 밟고 비명을 질러서, 스코틀랜드인에게 공격에 대한 경고를 알렸다는 민속설화를 지지하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라틴어 표어 “nemo me impune lacessit” (나를 건드리는 자는 성하지 못하리라)가 일반적으로 스코틀랜드 엉겅퀴 문장과 같이 있다는 것이다.
가문 구성원은 가문 고유의 타탄을 착용하였다. 타탄은 혹독한 스코틀랜드 기후를 견딜 수 있는 실용적인 일상복이자, 구성원이 소속한 또는 연대한 가문을 표현하는 자랑스런 제복이었다.
오늘날 하일랜드 의상에서 가문 구성원의 전투 준비 태세 흔적이 보인다. 하일랜드 복장36)은 벨트를 두른 타탄무늬 어깨걸이 천, 양말이 흘러내지 않게 묶어 주는 끈 (보통 진홍색이고, 특별한 매듭으로 묶여졌으며, 게일어로 snaoim gartain로 부른다.), 재킷 또는 더블릿37), 목 짧은 신발 (검은 색 또는 갈색 브로그(구두)38)가 붉은 색 바탕의 타탄과 어울리는 적절한 외출용 복장이다.), 그리고 특별한 행사 시 무구(武具) 등으로 이루어진다.
무구는 보통, 손을 보호하기 위해 손잡이가 진홍색으로 안을 댄 바구니 형태인 클레이모어 검, 허리띠에 걸치는 더크39), 양말에 단검, 벨트에는 단발 전장식 고대 권총 등으로 구성된다. 뿔 화약통은 공격 태세로 바로 들어가기 위해 입구를 전방으로 한 상태로 오른쪽에 부착한다.
가문 구성원들은 사기를 높여 주는 백파이프 소리를 들으면서 전투에 돌입하였는데, 16세기 이전부터 백파이프는 군악기뿐만 아니라 가문의 일상적 애경사에도 사용되고 있었다. 백파이프는 몇몇 국가에서도 찾아 볼 수 있지만, 힘차고, 풍부한 음색을 가진 하일랜드 백파이프만이 세계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다.
타탄
타탄은 게일어로는 체크무늬를 의미하는 “부리칸40)“이며, 타탄 양식에서 나타나는 체크 모양과 같은 배열을 묘사하고 있다. 초기 타탄은 가문 거주 지역에서 찾을 수 있는 재료들로 생산되었다. 초기 직공과 염색공들은 그들이 할 수 있었던 기술이라든가 소재에 한계가 있었다.
“1600년대로 돌아가면, 가정주부는 실을 뽑았고, 아버지는 베틀에서 천을 짰습니다. 어두침침한 오두막 구석에서 말이죠.” 라고 해리는 말한다. 그는 뛰어난 타탄 디자이너이며, 문장 학회 회원이고, 많은 고대 스코틀랜드 복식 조각들을 감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 전문가이다.
“모직물은 자연에서 채집한 지역 염료로 염색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적자색을 위해서는 딱종나무 열매에서 염료를 짜 내는 겁니다. 검은색은, 진짜 검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껍질이나 갓난가지가 있는 블랙베리에서 옵니다. 터리풀41)은 진회색을 만드는데 사용되었고, 엷은 황갈색 또는 밝은 갈색은 이끼에서 왔습니다. 노란색은 자작나무 잎, 양파 껍질, 흔한 소루쟁이 풀 또는 고사리 뿌리에서 만들었습니다. 파란색은 담쟁이 열매, 산앵두나무 열매 또는 쥐똥나무에서 채집한 열매에서 옵니다. 붉은색은 자작나무 내피 또는 흔한 수영 풀을 사용하였습니다. 보라색은 자두에서 얻었습니다.”
“염색 기술은 대동소이합니다. 식물, 껍질 또는 열매를 끓여서 죽처럼 만들기 위해 휘졌습니다. 소금을 사용하면 염색은 더 빨리 됩니다. 처리를 마친 천은 불순물을 제거하기 위해 개울에서 빱니다. 완성된 타탄은 현대 아닐린 염료를 사용한 것과 색상을 비교하면 빛깔이 바랜 듯합니다. 전통방식으로 만든 타탄은 거의 강한 색상을 가지고 있지 않죠. 전통방식 타탄의 색상들은 서로 잘 어우러져 있답니다.”
가장 흔히 착용된 킬트는 벨트를 맨 어깨걸이 천이었다. 그것은 치마처럼 허리에 감아 벨트로 고정하고, 어깨에 나머지를 걸쳐 매어서 브로치로 고정하고, 나머지를 뒤로 늘어뜨렸다. 부리칸 페일42)이라고도 부르는 벨트를 맨 어깨걸이 천은 따뜻하면서 묵직한 하나의 천으로 만들어졌다. 그렇게 온몸을 덮고 있기 때문에,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킬트 속에 무엇을 입고 있을까 라는 오래된 의문이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물론 해리 린들 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킬트 대가(大家)는 그것에 관해 매우 솔직하다. “답은 단순합니다. 하일랜드 사람이 벨트를 맨 어깨걸이 천을 입을 때, 속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는답니다. 유일한 예외는 현대의 티셔츠와 같은 면 튜닉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많은 면직물과 삼베가 생산되었고, 햇빛에서 표백하기 위해 산기슭에 널어놓았습니다. 튜닉 위로 보온성을 유지하기 위해 털이 그대로 나 있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조끼를 입었답니다.”
“벨트를 맨 어깨걸이 천은 4~5미터에 이를 정도로 꽤 길었습니다. 어깨걸이 천을 고정하는 벨트이외에도, 하일랜드 사람들은 중요한 물건들을 가지고 다니기 위해 스포랜43)이라고 불리는 작은 가방을 착용하였습니다. 하나는 돈이었고, 그가 돈이 있다면 말이죠, 그리고 그를 지탱해 줄 오트밀이었습니다. 긴 행군 때에 오트밀을 한 움큼 잡아, 개울물에 불려 행군하면서 먹었습니다.”
돈과 식량을 제외하고 스포랜에 넣을 수 있는 물건은 퀘익44)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위스키를 마실 때 사용하는 두 개의 귀가 있는 나무 용기로, 게일어로 컵을 의미한다.
힘든 일을 하는 하일랜드 사람들은 위스키가 제공하는 따뜻함과 기운 나게 하는 것이 필요하였다. 예를 들어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 가문의 전사들은, 야영지에서 잠들기 전에 찬물로 그들의 어깨걸이 천을 적시어, 젖은 천을 몸에 감았다. 물이 얼었을 때 만들어진 딱딱한 얼음막은 매서운 하일랜드 바람으로부터 지켜주는 든든한 보호막 역할을 해 주었다.
위스키는 고통스러운 해동과정에 있어서 환영을 받았다. 하일랜드 사람들은 스포랜에서 퀘익을 꺼내 위스키 한 모금으로 자신들을 몸을 따뜻하게 만드는데 사용하였을 것이다. 이런 가혹한 생활방식을 겪은 전설적 전사 롭 로이는 위스키에 젖신 오트밀 덩이인 “위스키 처키즈45)” 식사방식으로 주로 생존하였다고 전해진다.
170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은 교양 있는 많은 가문 수장들이 그들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겔트 풍의 문양을 새긴 은, 주석 그리고 금 퀘익을 만들게 했다.
그림 14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 Jacobite rising, David Morier (1705년경-1770)), 다양한 타탄문양 및 킬트복장을 볼 수 있다. |
스코틀랜드 위스키 업계는 전통적으로 ‘퀘익 수호자 퀘익 수호자 단체와 함께 그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수호자’로 더 잘 알려진 그 단체는, 발렌타인 회사도 창립멤버이기도 하는데, 유명 스카치위스키 증류소들에 의해 설립된 회원제 협회이다. 설립목적은 스카치위스키의 고결함을 지키고 명성을 높여나가기 위해 공헌한 사람들을 기리는 것이다. 홍보대사 중에는 스코틀랜드 민족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의 역사를 지닌 스코틀랜드 명문 가문의 수장들도 있다.
해리 린드리는 1986년 위스키 축하연을 여는 ‘퀘익 수호자’을 위해 타탄을 디자인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바탕은 생명의 물을 상징하는 파란색으로 하였습니다. 보리는 노란선, 피트는 갈색 색조로 표현하였죠. 물 색깔은 특별히 아일레이와 오크니 지역의 물색깔입니다.” 라고 해리는 설명한다. 최근 그는 ‘수호자’의 명예회원이 되었다.
생명의 물
위스키는 스코틀랜드 일상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증류 초기 역사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이제 200여 국가에서 즐기고 있는 위스키는 처음에는 생명의 물이란 의미를 지닌 아쿠아비테 aquavitae 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고대 언어인 게일어에서는, 그것이 위스게 바하 uisge beatha 나중에는 우스퀴보 usequebaugh로 쓰였다.
12세기, 영국을 점령한 헨리 2세의 병사들 귀에는 그 발음이 마치 위스기 uishgi로 들렸다. 그것이 나중에 위스키 ‘e’가 빠진 whisky (위스키)로 되었다. ‘e’가 없다는 사실은 꼭 주의해야 한다. e가 들어간 Whiskey는 아이리쉬 위스키와 아메리칸 위스키에서 사용하는데, 그 풍미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스카치에 비해 한 수 아래라고 말한다.
증류에 대한 가장 초기의 문서기록은 500년 전에 만들어졌다. 1494년 어떤 사무원이 스코틀랜드 재무부 문서에 정성들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수사 존 콜에게, 아쿠아비테 증류용으로 여덟 개의 몰트 볼47)”. 한 개의 볼(곡물 측정 단위)은 6 부셸48) 또는 25.4 킬로그램이다. 수사 존이 누구인지는 수수께끼다.
스포랜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퀘익으로 마시던 위스키에는 의학적 효능이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리하여 1505년, 에딘버러에 있는 왕립 외과 대학에 위스키 제조 감독 권한이 주어졌다. 1636년에는 영국에서도 의사들이 유사한 감독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고명한 증류주 생산자 협회”를 설립하였다.
배탈을 위한 가장 오래된 약은 위스키에 약초와 향신료로 이루어진 하일랜드 쓴약49)이다. 식사 전에 아무것도 타지 않은 위스키 한 잔은 해외에 가서 식사가 바뀔 때 생기는 배탈을 막는 대중적인 예방책이다. 설탕 또는 꿀과 뜨거운 물을 넣은 위스키인 핫토디50)는 보편적으로 일반 감기를 누그러뜨리는 진통제로 인정받고 있다. 그리고 내과 의사들은 매일 소량 위스키를 마지면 신진대사가 나쁜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타탄이나 가문제도와 같이 위스키도 국가를 건립하고, 전통을 형성하고 민족 긍지와 스코틀랜드 사람의 단호한 성격을 형성하는 데에 역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동의하듯이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음주 전통은 켈트족의 흥51) 사랑에서 왔을 겁니다.” 라고 발렌타인 회사 헥터 맥클레넌이 설명한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의 모든 중요한 단계를 위스키로 기념한다. 아이가 태어나면 산파에게, 세례식과 약혼식 그리고 모든 결혼식 때, 위스키를 대접한다. 새집을 짓거나 또는 고깃배가 무사히 귀항할 때 위스키 잔을 들어 올리며 축하하곤 한다.
“예나 지금이나 가장 큰 의식은 장례식입니다.” 라고 헥터는 덧붙인다. “세상을 떠난 혼은 접대를 통하여 친척이나 친구들 사이에 더 오래 머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부디 그들에게 넉넉히 위스키를 주거라.” 라고 임종 때의 한 하일랜드 지주가 아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에 참석한 손님들에게 넉넉히 위스키를 제공하지 않는 것은 망자에 대한 모욕이라 여겨졌다. 그러한 장례식을 목격한 영국 장교가 스코틀랜드 장례식은 잉글랜드 결혼식보다 더 즐겁다 라고 말했다고 하는데 놀랄 일도 아니다.
“가문 제도가 가진 대가족 제도 때문에, 대규모 장례식에서 위스키가 800 리터도 소비되지 않으면, 부끄러운 일로 여겨지곤 했습니다.” 라고 헥터는 덧붙인다. 이러한 장례식은 며칠 씩 진행되기도 했고, 종종 장관을 연출하곤 하였다.
“컬로든에 뿌리를 둔 명문 가문 수장인 포브스가 어머니 장례를 위해 치른 접대는 호화스러웠습니다. 장례 행렬은 밤에 횃불을 들고 백파이프를 불며 진행되었습니다. 아주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상객들이 묘지에 도착했을 때, 시신을 안 가지고 온 것을 알았습니다. 컬로든의 포브스는 당시 자신의 증류소를 가지고 있었답니다.”
스코틀랜드 접대는 전설적이다. 1498년 초기, 스코틀랜드에 파견된 스페인 대사가 집으로 편지를 쓰기를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정말 외국인을 좋아하여 누가 그 손님을 모시고 접대할 것인지를 놓고 이웃들과 다툴 정도다. 스코틀랜드에서 돈을 제외하고 부족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라고 할 정도다.
여기까지의 영어 원문은 다음 링크에서 볼 수 있다.
* 발렌타인 타탄
그림 15 캠벨 |
그림 16 스튜어트 |
발렌타인 성은 포괄적인 가문 성이 아니고, 씨족52) 성 또는 (어떤 가문과 연관이 있는) 가족 성이다. 세계 최고의 고급 위스키 창시자인 조지 발렌타인과 같은 씨족 구성원에게는, 그들과 전통적으로 연관되어 있는 가문의 타탄을 착용할 수 자격이 주어진다.
발렌타인은 다른 가문들과 아주 오래된 연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특히 두 개의 가문과 연관성을 둘 수 있다. 조지는 로버트 2세 왕의 후손들이 착용한, 뷰트 섬의 스튜어트 가문 타탄을, 또는 1725년에 정해진, 아가일에 있는 캠벨 가문 타탄을 선택하였을 것이다.
조지 발렌타인 같은 로우랜드 사람들은 하일랜드 사람들과 같이 킬트를 일상복으로 착용하지는 않았다. 킬트는, 저녁식사, 번즈 나이트53) 그리고 시민 모임 등과 같은 특별한 날을 위한 것이었다.
뷰트 섬의 스튜어트 가문 타탄은 보통 가문 구성원 자격을 가진 사람들만이 착용한다. 전통적으로 빨간색인데 적갈색 형태54)가 발전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 색깔이 뷰트 후작55)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은 것은 아니다.
조지 발렌타인은 캠벨 타탄을 더 선호하였을 개연성이 높은데, 그 타탄 디자인은 공식화되어 널리 대중화되기 오래 전부터 고대 씨족들이 착용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블랙 워치56)가 착용한 군사용은 더 어두운 색조로 염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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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Clan: 씨족, 부족 등의 의미가 있지만 여기에서는 가문으로 번역한다.
32) 오두막집의 토요일 밤 The Cotter’s Saturday Night
33) 영국 (United Kingdom)의 공식명칭은 The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즉 잉글랜드(England), 스코틀랜드(Scotland), 웨일즈(Wales)와 북아일랜드(Northern Ireland)로 이루어진다.
34) 제임스 1세(James I, 1566년 6월 19일 ~ 1625년 3월 27일)는 잉글랜드에 투쟁한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 1세로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6세로 부른다.
35) 가문: 여기서 말하는 가문이란 스코틀랜드 가문 클랜 clann을 의미한다.
36) www.tartansauthority.com 하일랜드 복장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있다.
37) doublet: 14~17세기에 남성들이 입던 짧고 꼭 끼는 상의
38) brogues: 일반적으로 가죽에 무늬가 새겨져 있는 튼튼한 구두
39) dirk: 스코틀랜드의 짧은 칼
40) 부리칸 breacan
41) 터리풀 Meadowsweet
42) 부리칸 페일 Breacan-feile
43) 스포랜 sporran
44) 퀘익 quaich
45) 위스키 처키즈 whisky chuckies
46) 퀘익 수호자 The Keepers of the Quaich
47) 볼 bolls
48) bushel 부셸, 곡물이나 과일의 중량 단위로 8갤런에 해당하는 양
49) 하일랜드 쓴약 Highland Bitters
50) 핫토디 Hot Toddy
51) Conviviality를,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술 마시고 유쾌하게 연회를 즐기는 모습이 한국인과 닮아 ‘흥’으로 옮김.
52) 씨족 sept
53) Burns Night 스코틀랜드인들이 민족 시인인 로버트 번즈(Robert Burns)의 생일을 기념하는 1월 25일 저녁
54) 적갈색 형태 a maroon version
55) 뷰트 후작 the Marquis of Bute. 스튜어트가문이 뷰트섬에 뿌리를 내린 후, 로버트 2세의 아들 존 스튜어트가 가문수장으로 임명되었는데, 그 후손들은 뷰트 후작직을 세습받고 있다고 한다.
56) 블랙 워치 The Black Watch 영국 육군 소속의 유명한 제 42 스코틀랜드 고지(高地) 연대. 체크무늬가 있는 제복이 검은 데서 이렇게 불린다. 정식명(名)은 Royal Highland Regim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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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 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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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로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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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Mor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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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튜어트가문 타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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