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흰쌀밥의 향기
essay drive
작성자
디노
작성일
2026-02-09 11:23
조회
7
새로운 모임의 첫 시간은 항상 긴장과 설렘이 가득하다. 과거에는 긴장의 크기가 더 컸다. 빠짐없는 자기소개의 시간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낯을 가리는 탓에 첫 마디를 때는데 참으로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부산 지하철 3호선 물만골역, 4번 출구로 나가면 과거의 나를 만날 수 있다. 도로를 넓히느라 사라진 건물들 사이에는 7살 적 다니던 웅변학원이 있었다. 남들은 다정하고 예쁜 유치원 다니던 나이에 뭔가 딱딱하고 엄한 웅변학원을 다니는 것이 조금은 불만이었던 때였다.
학원 시절 수업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약간의 흐릿한 잔여물 하나 정도만 존재할 뿐이다. 웅변학원이니 단상이 있었고, 학우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었다. 딱 그뿐이다. 아니, 앞에서 제대로 말하지 못한 7살의 내가 남아 있을 뿐. 눈앞에 학우들이 몇명 있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선생님 두 분과 통학을 위한 봉고 기사님 한 분만 기억난다. 남자 원장 선생님과 여자 선생님이 계셨는데, 여자 선생님은 만능이었다.
점심시간 직전이 되면, 밥 향기가 나기 시작한다. 각자의 집에서 반찬을 가져오면, 학원에서 해주시는 밥과 함께 먹는 식이었다. 크지 않은 학원이라, 교실까지 그 냄새가 퍼졌다. 기억의 오류 혹은 추억의 포장일 수 있다. 말 그대로 좋은 쌀로 갓 지어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밥에서 날 수 있는 향이었다. 가끔 그때의 생각이 나면 침이 고일 정도다. 그날은 냉동실에 얼려 놓은 밥이 아니라, 생쌀에 손이 간다. 두어 번 씻은 후 밥통에 넣고 다 될 때까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밥에 대한 기억만 있는 걸 보니, ‘웅변’ 학원에서의 배운 건 없었나 보다. 아니, 없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많은 사람 앞에서 발표는 여전히 긴장되고 떨린다. 끝나고 나면 무슨 말을 한 건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니 말이다. 그 외 작은 모임에서의 모습은 사뭇 달라진다. 아무래도 자신감의 차이인 듯하다. 눈치 보며 할 말 못, 못 할 말 다 할 정도가 되었으니, 이 정도면 충분히 성장했다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누군가는 ‘그까짓 게?’라고 할 수 있지만, 과거의 나를 보지 못했으니.
가끔은 하고 싶은 말이 많아 꾹 참는 경우가 있다. 아직 조리 있게 잘하지는 못해서, 그때는 속으로 말의 순서를 수정하거나, 단어의 선택을 바꾸기도 한다. 그럼에도 부족하지만.
말하기가 어색했던 오랜 시간이, 잘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변했다. 잘한다는 건, 많은 것과는 다르다. 속도와도 관계가 없다. 때와 장소에 맞춰 적절한 언어를 사용해, 듣는이가 이해할 수 있는 의견을 내는 것이 잘 함의 기준이라 생각한다. ‘듣는 이가 이해할 수있는’것이 중요하다.
오늘도 타인의 말을 집중해서 듣는다. 대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듣기이니까. 혼자만 말할 거라면, 잘할 필요는 없다. 집에서 벽보고 아무 소리나 내뱉어도 말하는 건 똑같으니까.
다시 7살 때로 돌아간다면 무엇을 배웠을지 궁금하다.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던 이유도 알고 싶고, 말이다. 선생님과 학우들과 함께하는 점심 식사도 꼭 하고 싶다. 꿈에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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