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이야
essay drive
작성자
디노
작성일
2025-11-22 11:25
조회
38
벌써 겨울인 것 같지만 가끔은 봄 같은 따스함도 전해주는 모호한 가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어느덧 거리의 은행나무에는 마지막까지 손을 놓지 않는 노란 잎이 바람에 살랑인다. 이별한 아이들은 검은빛 아스팔트 바닥에 노란 무늬를 뭍혀 놓았다. 이 녀석들도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고, 사람들의 발자국에 으스러져 곧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마치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다음 가을을 기약하겠지.
겹쳐 입기를 좋아하는 탓에 여러 옷으로 가을의 추위를 견딘다. 날이 갈수록 이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두꺼운 옷을 꺼내기 위해 정리를 시작했다. 먼저 좋아하는 셔츠 그룹이 눈에 들어왔다. 빨간 체크, 검은 바탕에 하얀 꽃무늬 셔츠 등 족히 10년은 된 듯하지만 아껴 입은 탓에 헤진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입어보지만, 단추 잠그는 것도 조금은 힘든 상태다. 부풀어 오른 뱃살보다 운동한 탓에 조금 벌어진 어깨 덕분에 꽉 끼는게 기분이 썩 좋다. 처리하기 위해 큰 장바구니에 넣어두지만, 괜히 한 번 더 쳐다보게 된다. 좋아하는 것들과의 이별은 쉽지 않다. 아마 이 상태로 며칠 더 함께하다가 집을 떠나게 되겠지. 다음번에는 오버사이즈의 흰검 셔츠로 다시 만나자.
널브러진 바지를 정리하다 구석에 쌓인 구두 상자를 발견했다. 이 녀석들도 족히 7년은 신지 않았다. 정장만 허용했던 첫 회사에서 치열하게 지내던 시절 나의 발이 되어주었던 구두들이다. 상품권과 할인 시즌에 품은 앉은 녀석들이라 저렴하지만 좋은 구두여서 애정을 갖고 신었다. 1주일에 한 번은 먼지를 닦아주고 한 달에 한 번은 광합성과 가죽케어 제품을 발라주며 애지중지했던 아이들이다. 가장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라 더 애정이 가는 신발이다. 이제는 나이 들어서 허리고 무릎이고 좋지 않아 딱딱한 구두가 불편하다. 신을 일도 없어서 오랫동안 어두운 상자 안에서 잠만 자고 있어 미안할 따름이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꺼내어 가죽 크림을 발라주고 보살펴 주는 정도. 아직 처분할 생각은 들지 않는다.
언젠가 가장 아끼는 구두를 신고 외출한 적이 있었다. 발은 불편했지만, 바닥과 닿을 때의 “또각, 또각”하는 맑고 명징한 소리에 걷는 자세를 바로잡게 만든다. 평소와 다른 차림이라 어디 가냐는 소리도 들었지만, 괜히 미소 한번 짓고 만다. 집 말고는 갈 곳이 없지만 뭐 있는 것처럼 살짝 티를 내 보기도 한다. 귀가 후에는 운동화와 다르게 손으로 신발을 벗는다. 조금이라도 굽이나 가죽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신발 하나 바꿔 신었을 뿐인데, 평소와 다른 모습이라니, 옷차림에 신경 쓰는 일은 단순히 외형의 꾸밈이 아니라 내면 정리와 바른 마음 가짐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멋진 구두와 깔끔한 슈트를 입은 모습으로 팔자걸음을 걸을 수는 없지 않은가. 이왕이면 백팩보다는 토트백과 함께.
마침, 오늘 햇살이 좋다. 구두를 모두 꺼내 끈을 풀고, 햇볕에 광합성과 시원한 바람을 느끼게 둔다. 그 사이 구석에 있는 구두약 상자를 꺼낸다. 까만 구두약으로는 굽의 얼룩을 지우고, 청소용 천에 가죽 케어 제품을 묻혀 정성스레 쓰다듬어 준다. 깔끔해진 아이들의 모습에 뿌듯함과 미안함이 들지만, 유한한 물건에 너무 의인화하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다. 오래되고, 좋아하는 물건에 대한 애정, 공수래공수거라던데.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우는 게 행복이라며 불과 지난주에 한 생각이지만 청소나 정리를 하다 보면 보면 또 오락가락한다. 언젠가 마음이 변하면 그때 생각하자며 깨끗해진 구두를 다시 상자에 넣어 둔다. 다시 볼 때까지 곰팡이와 바람은 피우지 마렴.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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