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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이 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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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디노
작성일
2025-10-06 08:01
조회
127
아버지께 카세트 플레이어(소니의 것이 아니었기에 워크맨으로 부르지 않음.)를 받고서 처음 한 것은 라디오의 주파수를 찾는 일이었다. 중1 당시에는 좋아하는 가수는 있었지만, 테이프를 살 생각을 하지는 못했다. 지금 기억에 정품 카세트 1개의 4, 5천 원 정도였던 것 같다. 물론 다음 해부터 모으기 시작했다. 첫 라디오 채널은 MBC였다. 당시 지방 방송국의 라디오는 자체 제작 프로그램 비율이 상당히 높았다. 이 때문에 사연은 부산 시민과 경남도민의 이야기로 채워져서 우리 동네 방송의 느낌이 있었다. 대중적으로 유명하지 않지만, 목소리는 최고의 스타였던 DJ님들은 까까머리 중학생의 감수성을 폭발시켰다. 당시 라디오로 접해 좋아하게 된 가수로는 유희열, 이승환, 김동률, 패닉 등등이었고, 몇몇 가수는 지금까지 좋아하고 콘서트를 쫓아다닌다. (다음 달 김동률의 콘서트 매우 기대)

 

중학교 2학년 시절에는 라디오 듣는 걸 좋아하는 친구 2명이 있어서, 다음 날이면 어젯밤의 라디오 이야기로 쉬는 시간을 채우곤 했다. 사연에 관해 이야기하고, 좋아하는 노래가 뭐였으며, 비슷한 분위기의 다른 곡을 추천해 주기도 했다. 곡의 추천은 대부분 친구의 형이나 누나로부터 제공된 정보였다. 그분들은 어쩜 좋은 노래를 많이 알까? 나도 남들한테 추천해 주고 싶다는 생각했다. 지금은 추천해 줄 수는 있지만, 추천할 사람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 추천보다 기계 추천이 보편화되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쓸모 있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30년 전보다 더 쓸모없는 사람이 된 건가 싶다.

 

과제 핑계로 PC통신을 접했다. 나의 선택은 나우누리였는데, 이유는 특별히 기억나지 않는다. KT의 하이텔, 데이콤의 천리안, 삼성의 유니텔이 있었는데, 뭔가 세련된 느낌이었다. 향후 나우루일 리는 변화를 거쳐 지금의 Soop, 아프리카TV라는 우리나라 인터넷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서비스를 만들고 운영하고 있다. (서비스의 인신과 별개로) 내가 느낀 세련됨이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PC 통신은 또 다른 세계였다. 다양한 게시판과, 동호회에서 수많은 이야기와 논쟁이 펼쳐지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신세계였다. 음악, 라디오와 관련된 게시판을 먼저 찾았던 것 같다. 당시에는 지금의 소셜미디어처럼 방송사 프로그램에서 PC통신을 적극 활용했다. 시청자 의견과 사연을 받아 방송하고 청취자에게는 다양한 선물을 주기도 했다. 파란 화면(PC통신의 배경색) 속에서는 대부분이 서울 사람으로 보였다. 내가 모르는 프로그램과 DJ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나도 즐겨듣는 ‘별이 빛나는 밤에’ 이야기를 들여다본 것 같다. 그 게시물 속에는 이적에 대한 칭찬과 존경, 그의 목소리에 빠져든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패닉이 아닌 이적 이야기를 이렇게 많이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가수 이적은 패닉으로만 알고 있었고, 최애 가수 중에 한 팀이었는데, 알고 보니 서울 버전의 별밤 지기였다.

 

‘마! 마! 스울에는 이적이 별밤 지기란다.’

‘진짜? 서울은 우리랑 같은거 듣거 아니가??’

 

다음 날 등교하자마자 라디오 청취 크루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예상은 했었지만, 대한민국 사람은 모두 다른 별밤 지기와 함께 밤을 보내고 있었다. 조금은 충격이었다. 부러운 마음도 있었지만, 애정하는 부산MBC의 별밤지기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어 DJ 이적을 궁금해하기보다 가수 패닉으로 좋아하기로 했다. 여담으로 그 시절에 나온 패닉 3집은 개인적으로 명반으로 꼽는다. <내 낡은 서랍 속의 바다>부터 <태엽장치 돌고래>,<‘뿔>로 이어지는 트랙은 지금도 퇴근길에 자주 듣는 플레이리스트다.

 

부산 별밤 지기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PSB(현 KNN) 부산방송이 집 근처에 생기고, 라디오로 프로야구 중계를 시작하면서부터 부산 별밤과는 멀어졌다. 그리고 동일 시간대 채널을 MBC에서 SBS로 옮겨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후 별밤과의 인연은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세대 차이가 느껴질 것 같다.

 

라디오만큼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소재도 없다. 이 정도면 1기의 요약본으로 볼 수 있다. 대충 4기까지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그만큼 함께한 시간이 많았고, 정서적으로도 많은 도움을 받았고, 지금의 음악 취향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요즘은 라디오를 라디오로 듣는 사람이 많이 없다. 라디오마저 영상으로 보는 시대다. 집에 있는 리시버에 안테나를 연결해서 가장 라디오다운 라디오를 들어 볼까 했지만, 앱스토어에서 ‘MBC mini’를 검색한다. 오랜만에 배철수 아저씨 목소리를 들으며 퇴근한다.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와 영어 발음은 여전하시다. 마침, 사랑해 마지않는 Daft Punk의 음악이 흘러나온다. 지하철 손잡이를 꽉! 잡고 눈을 감는다. 혼잡한 지하철 안을 사람들로 자유로운 영혼들로 가득한 클럽 무대로 생각하며 버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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