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say

시간은 쓰기 나름

새벽감성1집
작성자
디노
작성일
2024-09-29 21:14
조회
96
채비하고 백팩을 맨 후 문을 열면 시원한 공기가 몸을 감싸고 지나간다. 다행이다. 땀을 뻘뻘 흘리던 여름이 지나 가을이 왔음을 알려주는 작은 흔적이다. 버스를 기다리기 위해 앉아 있을 때면 항상 하늘을 바라본다. 끝없이 펼쳐진 파란 하늘을 보면 출근길의 우울함이 20%는 감소시키는 듯하다. 그곳에는 김포공항을 출발한 비행기가 목적지를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 더 해진다. 덕분에 회사가 아닌 공항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다시 우울함 20%가 더해져 디폴트가 된다. 기본 상태이기에 특별하지는 않다.

여유롭게 가자며 마음을 먹지만 전광판에 9호선 급행이 보이면 달리게 된다. 놓치면 10분 정도 늦어지기 때문에 달린다. 불필요한 기다림이 싫기 때문이지만, 필요한 기다림으로도 만들 수도 있다. 기다림을 활용하는 방법 중 사람 구경이 있다. 다른 이들은 출근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역시 오늘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가끔 독서하는 이를 보면 무슨 책인지 궁금해 이리저리 눈을 굴린다. 호기심이 생기는 제목이면 밀리의 서재에서 검색해 보고 취향에 맞다면 서재에 담는다. 없다면 교보문고로 접속해 장바구니에 담아 준다. 그렇게 모인 책이 십여 권이 된다. 언젠가 읽겠지, 하며 담아주고, 오래전부터 장바구니에 서식하고 있던 가장 아래 책부터 조금씩 구매한다.

시간에 따라 공간의 여유가 달라지는 지하철을 타면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스마트폰을 볼 때가 있다. 쓸모없는 SNS 낭비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들 아니 우리에게 그 시간은 어쩌면 유일한 휴식 시간일 수 있다. 좁은 공간을 버텨내고, 업무 전까지의 자유를 흥청망청 낭비하고 싶을 때가 있다. 출, 퇴근길이라는 공간 속에 우리는 각자의 세계에 들어가 즐긴다. 그 세계는 무한의 영역이다.

오늘 퇴근길은 라디오와 함께 다르게 가보려 한다. 한참 많이 듣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배철수 아저씨의 음악캠프를 듣는다.  6시에 시작하기 때문에 5시 퇴근인 나는 2, 30분밖에 듣지 못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아늑해지고, 좋은 음악을 들을 때면 주말 전 설레는 마음이 증폭된다.  아저씨 특유의 여전한 말투는 자주 듣던 20대를 떠오르게 한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하굣길을 책임져 주던 분이다. 좋은 곡이 나오면 괜히 집 주변을 두어 바퀴 돌고 들어가기도 했던 추억이 있다. 버스 환승을 위해 마음은 여유롭지만 발은 누구보다 빠르게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아뿔싸 에스컬레이터가 고장 났는지 공사 중이었다. 뒤돌아 계단을 타고 힘겹게 올라간다. 이때 마음은 우사인 볼트지만 다리는 거북이와 같다.

조금 늦어지는 귀가 시간에 아쉬움과 짜증이 섞여 한숨을 내쉬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몇 분 차이로 횡단보도 파란불이 빨간불로 바뀌었고 눈앞에 서서 버스 몇 대를 놓쳤다. 다음 버스는 길게는 10분 정도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벌어진 일이다. 그 시간만큼 배철수 아저씨의 목소리를 더 들을 수 있으니, 럭키다! 몸은 평소보다 조금, 사실 정말 조금 더 힘들다. 그래도 귀가 즐겁고 마음도 행복했기에 이런 마무리면 충분하다. 사소한 것에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이 이어지면 좋겠지만, 매번 그럴 수 없다. 이거면 됐다. 오늘 하루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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