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정식
'고요(古諭)'의 미학을 완성한 한국 현대사진의 대표 작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휘문고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 1960년대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사진학을 전공했다. 〈나무〉, 〈발〉, 〈풍경론〉, 〈고요〉 등의 연작을 통해 한국적 추상사진의 길을 개척했다.
"고요는 사진이 아니었다. 그가 보고 싶었던 세계였다."
스승의 제자가 풀어놓는, 한 사진가의 평생에 걸친 침묵의 여정 ―
일본 유학, 중앙대 사진학과, 1990년대 〈나무〉와 〈발〉, 2000년대 〈고요〉,
그리고 70대 이후 사진이라는 단어조차 사라진 마지막 일기까지.
제자 이일우가 본 스승 한정식 — 사진가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강연을 가능하게 한 두 인물의 좌표
'고요(古諭)'의 미학을 완성한 한국 현대사진의 대표 작가. 서울대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뒤 휘문고 국어 교사로 재직하다 1960년대 일본대학 예술학부에서 사진학을 전공했다. 〈나무〉, 〈발〉, 〈풍경론〉, 〈고요〉 등의 연작을 통해 한국적 추상사진의 길을 개척했다.
한정식의 대학(중앙대) 제자이자 국제전시 기획자. 순수사진·현대미술을 전공한 뒤 독일에서 현대미술을 수학했고, 2005년 귀국 후 작가·전시 기획자로 활동해왔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한정식 — 고요〉 회고전을 기획했으며, 작가 사후 KP갤러리를 통해 한정식의 미발표 작업 발굴과 공식 홈페이지 운영을 이어가고 있다.
제자 이일우가 풀어놓는 81분의 회고 — 전문 정돈
안녕하세요, 이일우입니다. 오늘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 세계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어 즐겁고, 많은 분들이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사진사적인 관점이나 한국 현대사진사 속 한정식 사진가의 좌표를 이야기하기보다, 순수한 한 사람으로서 ― 이 땅에서 태어나 사진가의 길을 걸었던, 그 길 위에서 '고요 (古諭)'라는 세계를 평생의 주제로 삼아 탐구했던, 그렇게 바라본 고요한 세계를 작품으로 만들었던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한정식 이야기를 전하려고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정식 선생님의 대학 제자입니다. 실제로 학교에 들어왔을 때 한정식 선생님 수업을 들었는데요, 재미있게도 저는 1학년 1학기 사진 실기 수업 단 한 학기만 들었어요. 저도 지금 순수사진과 순수미술을 전공했지만, 이상하게 학교 다닐 때는 한정식 선생님을 전공 지도교수나 작품론을 지도해주시는 교수님으로 뵌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1학년 1학기 실기 수업을 한 번 듣고 나니까, 학교에서 뵐 때마다 잔소리를 그렇게 하셨어요. 한정식 선생님이 휘문고 국어 교사셨거든요. 그래서 중·고등학교 선생님으로서의 어떤 특성이 학생들에게 발휘돼서, 만나면 항상 "밥은 먹었냐", "군대 갔다 오면 취직해야 한다", "장가 가야 한다" 같은 잔소리를 정말 많이 하시던 선생님으로 기억합니다. 그 잔소리들이 싫은 잔소리가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주시는 잔소리, 그런 인상으로 대학 시절의 한정식 선생님을 처음 뵈었습니다.
그 당시 한정식 선생님께서는 물론 〈고요〉 작업도 진행하고 계셨지만, 함께 보여주시던 〈풍경론〉이나 형식주의적인 사진들에 저는 사실 별로 관심이 없었어요. 학교에서 배웠던 건 유럽과 미국의 현대 사진이었고, 그런 공부들을 하면서 저 역시 '현대 사진가로서 나의 작업 세계를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대학을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공부했습니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서 제가 하고 싶었던 건 그저 '현대 예술가로서의 나의 모습을 이 땅에서, 한국에서 만들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한정식 선생님의 '고요'라는 세계를 그동안 바라보고 정리하고 전시를 만들어온 일련의 과정이, 사실 저 자신의 이 화두와 깊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2005년에 귀국한 뒤에도 저는 여전히 현대예술·현대사진과 관련된 작업 활동을 하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 잔소리 많으셨던 선생님께 가끔 개인전을 할 때마다 연락을 드렸어요. 한정식 선생님은 늘 오프닝에는 안 오시고 늦게 와서, "밥 사주러 왔다"고 하셨어요. 많은 제자들에게 "밥 사주러 왔다"고요. 비싼 데를 같진 않으세요. 적당히 맛있는 데 데려가서 밥을 사주시고, 가시기 전에 봉투를 놓고 가시더라고요. "고생한다"고요. 그게 너무 감사했습니다.
금액이 큰 건 아니지만 ― 항상 한 30만 원 정도였어요 ― 제자라고 생각하는 저를, 또 녹록지 않은 예술 환경에서 작업해 나가는 게 기특하셨는지, 개인전 할 때마다 그렇게 봉투를 들고 오셨어요.
저는 작업뿐 아니라 전시 기획자 일도 같이 해왔는데, 지금도 무산 국제사진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지만, 아마 그때가 서울사진축제 예술감독을 맡고 있을 무렵일 거예요. 2016년 초였던 것 같아요.
한 선생님께서 저한테 전화를 주시더니, "한번 사무실로 와라"고 하시더라고요. 저야 늘 감사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네 선생님, 바로 가겠습니다"하고 사무실을 찾아갔죠.
그랬더니 선생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 당신께서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5명의 한국 현대미술작가로 선정되셔서, 2017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어야 하는데, "그것을 한번 기획해 줄 수 있겠냐"고 물어보셨어요. 저는 그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네, 제가 하겠습니다" 했어요. 물론 기획자로서의 자부심도 있었지만, 늘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하셨던 선생님께 무언가를 보답하고 싶다는 마음이 컸습니다.
그때부터 1년여, 1년 이상의 시간 동안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대규모 회고전을 잘 개최했고, 그게 인연이 되어 그 이후로도 선생님의 작품 정리, 작품 발굴 ― 돌아가신 후에도 한정식 선생님의 작업 세계를 국내외에 알리는 역할을 지금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 세계가 제게 처음으로 다가오기 시작한 거죠.
과거의 제게 한정식 선생님은 여느 오래된 사진가들처럼 잔잔한 아시아적 풍경, 동양적 풍경을 찍거나, 절·자연환경·바다·산·돌 같은 것들을 찍는 분이었어요.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와서 현대 미술가로 살려고 했던 제게는 한편으로 진부하고, 한편으로 고리타분하고, 한편으로는 '나에게는 오래된 원로 사진가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고요〉 사진도 비슷했어요. 초창기 〈고요〉 사진들.
그런데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현대미술작가로 선정되시고 전시를 준비하다 보니, 그 작업들이 처음에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시간 속에서 제가 한국으로 돌아와 이 땅에서 작업하며 가지고 있었던 문제의식들을 풀어가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동시에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 세계라는 것을, 단지 사진가적 관점에서, 사진가의 결과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 열망했던 자신의 고유한 세계로 다가가고 싶었던 그 길 위에서 만들어진 결과물로서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요'라는 작품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제가 가졌던 생각들은, 앞으로 설명드릴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 세계와도 연결됩니다.
현대 미술가로서 저는 한국에 돌아와 일정 시간이 지났을 때, 제 마음속에 무언가 부딪히는 게 있었어요. 저는 지극히 독일 현대주의 미니멀이나 컨템퍼러리 아트에 기반한 사진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제가 했던 작업들과 ― 그렇게 자부심을 갖고 그 길을 가겠다고 결정했던 저의 모습들과 ― 마음속에서 자꾸 무언가 부딪히더라고요.
한순간도 제가 해온 것을 의심하거나 자부심을 의심한 적 없이 해왔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자꾸 낯설게 느껴지고, 또 제가 했던 것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게 만들었던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고요'라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아, 이거구나'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어요.
그건 뭐였냐면 ― 제 마음속에서 부딪혔던 것은 나의 머리는 서구 미술을 향하고 있었고, 서구 예술가로서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지만, 나의 몸은 이 땅에서 태어나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고 한국의 문화와 한국의 시간 속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머리와 몸이, 머리와 마음이 부딪혔던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의 머리는 끊임없이 서구 미술의 이상적인 모습들을 형상화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고요'라는 것은, 과거에 제가 진부하다고 여겼던 '동양적 사진', '동양 풍경적 사진', '목가적 사진', '정적인 사진'이 아니라, 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한가, 또 그것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를 알게 해주는 계기였습니다.
2017년에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전시를 만들고, "이제 숙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때부터 선생님이 좀 아프시기 시작하셨어요. 집 밖을 잘 못 나오시기 시작했고, 그래도 가끔 찾아 뵙긴 했지만, 2020년 즈음 다시 저에게 전화를 주셔서 집으로 부르시더라고요.
집으로 갔더니 잘 걷지도 못하시고 앉아 계시면서 "보고 싶어서 전화했다"고 하시며 한 가지 부탁이 있다고 하셨어요. "너 시간 괜찮으면 일주일에 한 번 나하고 밥 먹자"는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그냥 "네 선생님, 같이 밥 먹어요" 하고 답했어요.
그 이후 3년 동안, 선생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매주 선생님 댁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점심을 함께 먹고, 가끔 필요한 것들 도와드리며 보냈습니다. 그 시간이 저에게는 한정식 선생님과의 인연을 ― 단지 사회에서 만난 선생과 제자의 인연이 아니라, 한 명의 인간과 인간으로서의 가까움, 더 밀접한 관계로 바꿔놓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한정식 선생님의 작업들을 계속 발굴하고 소개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어요.
말씀드렸듯 '고요'는 사실 사진이 아닙니다. 저는 처음에 '고요'를 사진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래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들도 다 〈고요〉라는 작업 명으로 소개되어 있거든요. '고요'는 선생님의 호이기도 했어요. 스스로를 '고요'라고 부르셨거든요.
'고요'는 초창기 한정식 사진가에게는 사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고요'는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고, 동시에 그가 보고 싶었던 것, 보고 싶었던 것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갈구하던 무엇이었고, 그런 과정에서 나온 작업들이 〈고요〉라는 이름으로 지금 우리 전시장에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2016~17년 동안 열심히 선생님의 작품들을 바라보고, 초기 작업부터 그 모든 것들을 어떻게 멋진 전시로 만들지 고민하면서, 2017년 전시를 열고 나름의 뿌듯함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3년, 그리고 돌아가시고 나서 선생님의 유품을 제가 직접 정리하면서 ― 남겨진 기록들, 그중에서도 1960년대부터 평생 쓰셨던 일기들을 읽으면서, 저는 두 번째로 '한정식'이라는 사진가를 ― 우리에게는 사진가로만 알려졌던 그분을 ― 새롭게 읽었습니다.
그 일기에는 엄청난 분량의 글이 있었어요. 국어 선생님이셨으니 얼마나 글을 많이 쓰셨겠어요. 일기에는 휘문고 교사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유학 가게 된 결심, 다시 돌아와서 힘들게 사진계 안에서 자신의 것을 만들어가던 과정과 갈등들, 학교 교사 시절, '고요'라는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그분이 어떻게 생각했으며 그것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가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한정식 선생님이 돌아가신 후 집에서 유품을 정리하는데, 대략 20만 컷쯤 되는 필름이 발굴됐어요. 사실 제가 2017년 전시를 준비하며 공부했던 것들은 책장에 잘 정리되어 있던, 그동안 발표된 사진 원고와 자료들이었다면, 낡은 박스 안에 있던 것은 수많은 일기 자료와 그동안 발표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던 필름들이었습니다.
그 3년의 시간 동안 자료 작업과 확인을 거치면서, 또 일기를 읽으면서 저는 앞서 말씀드린 결론에 이르렀어요. 한정식 사진가의 '고요'는 사진가의 결과물이 아니라, 그가 남긴 이야기로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비로소 '고요'라는 것이 한정식이라는 한 인간 안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 혹은 답을 찾을 수 있다.
말년에 일기에서 가장 많이 나온 이야기는 절(寺)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부처님 사찰에 가서 부처님께 기도하면서, "부처님, 부처님, 눈 좀 뜨게 해 주세요. 부처님, 부처님, 고요를 보게 해 주세요. 부처님, 부처님, 꼭 보고 싶어요"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한정식 사진가는 오히려 50대, 60대를 지나 70대 이후에 훨씬 더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50대·60대·40대 이전 시기 작품들에 대한 자기 반성·자기 성찰을 거쳤어요. 학교에 계실 때만 해도 사진가로서 사진 작품으로 사진 학교·사진 예술을 이야기하던 과정에서의 '고요'였다면, 그 이후 70대 이후의 '고요'는 ― 앞서 말씀드린 ― 순수한 인간으로서 갈망했던 세계의 '고요',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서 이야기하는 '고요'였습니다.
고요는 내가 사진으로 이루고자 하는 나의 세계다. 고요를 찾아 그 고요 속에 내 사진을 담그고자 해서가 아니다. 고요는 곧 적정(寂靜) 적멸(寂滅)의 경지, 내가 이루고자 하는 궁극이었다.
이 말씀을 잠깐 짚고 가겠습니다. 1960~70년대 초 한국의 사진가들이 사진을 새롭게 배울 수 있는 곳은 일본이었습니다. 훨씬 더 선진화된 사진 문화가 그곳에 있었어요. 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시고 사진가의 모습이 되기 위해 일본으로 가셨고, 돌아와서는 일본에서 경험한 선진화된 사진론들을 기반으로 '한국 사진에서 우리만의 사진은 무엇인가, 우리 사진의 길은 어떻게 가야 하는가'라는 부분에 많은 고민을 가지셨습니다.
대략 30년의 시간 동안 한국에서 사진 예술에 있어 한정식 선생님이 이야기하셨던 것이 '사진 예술 기록' 또는 '작품론에 기반한 사진'이었다면, 지금부터 보실 일기들은 대학 교수직을 그만두신 이후의 시간 동안 한정식 선생님이 가지셨던 생각들입니다.
"방을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떨림이 일었다. 방 사진을 찍었는데, 방이 아니다." — 빈 방의 네모난 탁자. 사물의 '제1의 의미'를 벗어난 '사진적 추상'의 대표작.
이 사진(집에 남은 미발굴 필름 중 한 장)을 보면 약간 도인처럼 보이실 수도 있어서 제가 일부러 풀어놓았어요. 한정식 선생님은 깐깐한 학교 교수님이기도 하셨고, 젊었을 때는 혈기 왕성하셔서 정말 날카롭게 상처 주는 말도 많이 하시고, 또 '자신의 고요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자랑하고 싶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드러내고 싶어 하시기도 했어요.
수없이 많은 인간적 욕망이 그 시간 안에서 들끓었고, 여자도 좋아하시고 ― 그 자체가 이미 '고요'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한정식 사진가의 작품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단지 이미지 또는 사진적 결과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남겨진 글들을 함께 읽어야 한다는 것이 제 결론이었어요. 저 자신도 글을 읽으며 훨씬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고요'라는 것이 사진은 작품으로서의 결과물이 아니라 '추구했던 세계'이며, 그 세계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그가 가졌던 욕망들, 욕심들, 후회들, 한계들, 그리고 마지막에 그것을 놓아가는 과정 ― 그것이 여기 계신 모든 분들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는 자기 서사, 자신의 시간, 그리고 그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는 그늘 진 돌 사진 ― 그림자 속의 돌 사진을 처음 봤을 때 이해되지 않았어요. 멋진 명상적인(meditative) 이미지라고만 생각했죠. 그런데 한정식 선생님은 그런 범주의 이야기가 아니라,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어요.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이,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현상을 현상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라는 것이 나의 정신 세계 안에서 '나'라는 정체성과 어떻게 연결되어, 내가 추구하는 지점으로서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 이런 부분에서 많은 생각을 하셨습니다.
물 위에 떠 있는 작은 이파리 하나에 대해 적은 글이 있어요. 저 아래 전시장에도 작은 사진으로 소개되고 있는데요:
연잎 옆에, 사물이 사물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사진은 찍힌다.
해외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럼에도 여기 계신 분들이 이런 문구를 읽으시면서 "저것이 저런 모습이 아닌가"라고 어렴풋이 떠올리실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의 정신과 생각이 이 땅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끊임없이 다른 외부 문화에 익숙했지만, 어느 순간 '나의 것을 찾아야겠다', '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것 역시 이 땅에서 우리가 가졌던 시간이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물 위에 떠 있는 이파리 하나로 "눈앞의 사물이 사물이 아님을 깨닫는 순간 사진이 찍힌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사진 자체가 찍히는 것이 아니라, 사물이 사물로서 익숙해지지 않는 순간, 그것이 하나의 세계로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순간 ― 그 순간 사진이 찍힌다는 의미입니다.
되게 뿌연 사진 하나, 자연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는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자연의 사진이란, 아름다운 자연 풍경의 재현이 아니라, 그 속 깊이 잠겨 있는 시원(始源)에 대한 향수, 하늘이 열리던 때의 아득함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떤 현상을 우리가 경험할 때, 그것이 드러나는 모습이나 현상 자체를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서구 모더니즘적 사고라면, 한정식이라는 개인에게는 그런 서구 사고가 중심이 아니었어요. 그가 이 땅에서 한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살아오며 경험하고 고민한 것들이 반영되어, 결국 자연의 사진이란 풍경·풍광의 재연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우리가 바라보고 싶었던 우리 철학, 우리 동양 철학, 한국의 철학 안에서 자연을 경험하고 자연을 대하고 자연을 이해했던 우리 고유의 사고들을 사진으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태풍의 눈이 그러하듯, 모든 움직임의 중심은 고요하다." — 관조(觀照)를 통해 '대상의 편에 서려는' 전환점이 된 연작.
유명한 돌 사진이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저는 이 돌 사진을 두고 "라이팅을 멋지게 하셨다", "동물적이거나 어떤 이런 돌을 블랙앤화이트의 명암 안에서 처리하셨다"고 생각했어요. 즉 현상에 대한 서구적 사고의 연장선에서 대상과 이미지를 파악한 거였죠.
그러나 한정식이라는 사진가에게 그 돌은 이렇게 다가왔습니다:
존재는 존재일 뿐 이유가 없다. 뭉툭한 바위가 까닭이 있어 거기 그렇게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는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다. 존재는 고요하다.
이러한 작품에 대한 철학적 접근들은 어느 한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재미있게도,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이야기들은 모두 한정식 선생님이 남기신 일기에 적힌 글에 기반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젊으셨을 때 스스로를 '현대 사진가'로서, 그와 관련된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을 추구하셨다면, 50대 후반에서 60대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고요'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합니다. 당신께서 이야기하시던 '사진적 세계, 사진 예술의 세계'에서, 명상에 대한 것·철학에 대한 것·이 땅에서 태어나고 자라며 자신의 모습을 만든 시간에 대한 것 ― 그것들을 중심으로 그가 바라보는 세계를, '도(道)'라는 키워드로 바라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셨습니다.
존재는 스스로 빛난다. 이유가 없다.
사실 그렇죠. 우리 모두 빛나잖아요. 그런데 우리 모두가 빛나는 데에는 이유가 없대요. 사실 없어요. 스스로가 빛나는 거죠.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 세계를 구성하는 무언가를 바라본다는 것은 늘 외부적 관점에 기반해서 '그것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고, 그것으로 우리는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다'고 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이미 그것들은 거기에 있는 것이고, 거기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며, 이미 우리 세계를 구성하는 것들입니다.
낙엽을 모아놓은 절 마당 사진이 있습니다. 한정식 선생님 댁에 유일하게 크게 걸려 있던 작품이 그것이었어요. 그 옆에 적힌 글이 이렇습니다:
일상이 증발한 곳, 절에서는 사물은 추상화되고 우리의 삶도 맑갛게 바랜다. 내 발이 디디고 선 땅조차도 백지장처럼 무게를 잃는다.
우리가 경험한 '사진'이라는 것, '사진 작품론'이라는 것, 그에 대한 이해는 우리가 공부하고 배우고 직접 해본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하지만 한정식 선생님이 작품 옆에 둔 이런 텍스트들은 우리가 경험하고 배웠던 사진론적 이해와 차이가 있어요. 그 차이를 통해 무엇이 옳다·그르다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결국 무엇을 바라본다는 것의 중심은 '나'이고,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인지하는 것도 '나'이며, 결국 그 세계의 중심은 '나'라는 것 ―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세계'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가 규정하고 다가가게 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거예요.
그늘 진 절 사진이 있습니다. 한정식 선생님은 절에 정말 많이 가셨어요. 일기를 보면 끊임없이 사찰을 돌아다니셨던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첫째, 절에 가면 부처님을 뵐 수 있다. 본인이 생각하시기에 인간으로서 자신의 능력만으로 '고요'에 다가가기에는 너무 힘든 길이었던 거예요. 그걸 알고 계셨기에, 부처님께 끊임없이 "부처님, 부처님, 눈 좀 뜨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둘째, 더 외로워지기 위해서. 나이 70이 넘으셔서 '고요'를 보기 위해 "더 외로워져야겠다"고 끊임없이 적으셨어요. 절에 가면 가는 길에 산도 있고 물도 있고 자연이 있고 세계가 있어서, 본인이 가진 기본적 성향 ― "사람과 부딪히는 것이 나에게 힘들다, 오히려 나는 조용히 바라보고 응시하는 게 자연스럽고 그게 나인 것 같다" ― 와도 맞았던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신비하다. 겉 속에 속이 들어 있고, 보이지 않는데 보이는 것이 있다. 보인다고 보이는 것이 아니고, 안 보인다고 안 보이는 것이 아니다.
물을 찍은 사진들에 대해서는 이런 글을 남기셨어요:
사진은 시간의 예술이다. 시간이 사진의 거의 모든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그러나 근본에서 사진은 시간을 잘게 썰어내는 일이다. 잘게 썰어낸 시간, 멈춰진 시간 ― 그 일상의 모습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멈춤의 틈, 늘어놓아 벌어진 틈에 시간은 자기 속살을 감추고 있다. 시간이 정지하고, 시간 이전과 시간 이후가 사라진 곳, 시간 밖의 출구, 빛으로 향한 길 위에 내가 서 있다.
"사진의 예술성을 향해 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의 세계이다." 기존 〈고요 I·II·III〉에 포함되지 않았던 미발표작들. 대상성의 흔적이 한층 더 옅어진 후기 작업.
저 역시 학교에서 사진을 전공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진 공부를 했습니다. 사진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모습을 이야기하며 그것이 왜 중요한지. 제가 젊었을 때 추구한 것은 '훌륭한 사진가, 유명한 사진가, 멋진 곳에서 훌륭한 예술 작품으로서 인정받는 것'이었습니다. 끊임없이 그런 모습을 자기와 일치시키며 그런 모습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빠진 것이 있다면 ―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보고 싶은가, 무엇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는가, 나는 앞에 있는 사람들과 어떻게 있는가,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의 의미를 어떻게 찾을 것인가 ― 이런 질문들이었습니다. 그런 질문들은 우리가 살면서 매 순간 마주하지만, 바쁜 삶 속에서는 답을 찾기도 하고 기다리기도 하고 외면하기도 하지요.
한정식 선생님은 젊었을 때 '사진가로서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사진가로서 존재하기'를 바라셨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결국 그는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점'으로서, 그 세계를 구성하는 점이 무엇인지에 ― 세계를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에서 벗어나, 오롯이 수많은 별 중 하나인 '나의 세계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는 데 집중하셨습니다.
돌아가신 이후 발굴된 원고들을 보면 이런 문장이 나옵니다:
사진의 예술성을 향해 사진이 추구하는 것은 추상의 세계이다. 이는 사진이 가진 주제라는 것 자체가 추상적 관념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학교에 교수님으로 계실 때 이런 깨달음을 우리에게 나눠 주셨다면 저희도 더 많은 영향을 받았을 텐데, 은퇴 후에야 본인의 것에 집중하시면서, 결국 그가 가졌던 시간 안에서 만든 사진이라는 결과물 역시 '사진'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모습'으로서, 그 작은 점 하나로서 ― 그 점이 왜 있는지, 어떻게 있는지 ― 이야기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1990년대 말, 제가 1998년에 졸업할 무렵 선생님의 일기는 이렇습니다:
요즘 나는 내면화되고 침전하여 보다 깊은 곳으로 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나의 작업은 명상적이고 추상적인 것에 매달리고 있다. 그가, 제 것을 파고들겠다는 것이다. 나는 사물이 내 안에 일으키는 어떤 파문 같은 것을 영상화하고 있다. 거기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깊이를 더하고 싶다. 사진 공부 30년 만에 비로소 최상의 가능성을 이제 겨우 찾아간다.
30년이면 사실 은퇴를 앞둔 시점이었어요. '고요'라는 키워드를 처음 만들어내신 것도, 초기에는 〈고요〉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으셨던 것을,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작업들을 어느 순간부터 회복시키고 싶어 하시다가, 나중에 '고요'라는 이름으로 묶게 된 것입니다. 1998년쯤 비로소 그 화두를 잡으셨다는 거예요. 저희 교수님이 저희들에게는 한 번도 이런 얘기를 제대로 안 해 주셨던 거죠.
'고요'의 화두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집중해야 할 것이다. 고난 하나 ― 사진 생각만 하고, 무엇보다 먼저 '사진이란 무엇인가'가 화두가 되어야 할 것 같다. '이 뭣고'가 스님들의 대표적 화두이듯, 내게 있어서 이것은 사진일 수밖에 없다. 거기서 출발해야 더 나은 사진, 더 새로운 사진이 보이지, 덮어놓고 '새로운 것이다, 깊이 있는 것이다'만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너무 늦은 느낌이 없지 않으나,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바로 시작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화두를 생각하게 되었다. 난 늙어 죽을 때까지 자랄 것이다.
이 글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고요'에 대한 화두만이 아닙니다. 한정식이라는 분은 인생 후반부에도 끊임없이 자신의 것을 갖고 싶어 하셨고, 자신의 것을 알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것이 몸이 움직이기 힘들기 직전까지 그러셨어요.
우리에게 익숙한 〈고요 I, II, III〉은 사실 은퇴 직전과 직후의 작업들입니다. 그 이후 시기에 가졌던 생각과 사유는 60대 중반과 60대 후반에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은퇴 이전까지는 한정식 선생님의 일기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끊임없이 등장했어요. 사진 예술, 사진의 정수, 사진과 고요. 그러나 어느 순간, 70대가 가까워지면서 그 이후로는 일기에 '사진'이라는 단어가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고요'만 나옵니다.
저도 의아했어요. 그게 어떤 변화였을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사진'이라는 단어로는 '내가 하나의 점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기가 어려웠던 거예요. 그 점을 바라본다는 것을 사진으로만 이야기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결국 점은 점으로서, 마음은 마음으로서 있어야 했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모든 이야기에서 '사진'이라는 단어가 사라지고, '고요 ― 나의 세계를 보고 싶다, 거기 있고 싶다, 가고 싶다, 부처님 눈 좀 뜨게 해 주십시오'라는 영혼의 호소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사진은 그 자체로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다. 사진은 보이려야 볼 수가 없다. 사진에서 보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사물인 것이다. 물이 그와 같았다. 물은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다. 들여다볼수록 돌이나 모래나 풀은 보일지언정 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 물을 찍어야겠다. 물 자체의 성질이 '고요'일 것이라는 생각이고, 그 고요함을 찍고 싶다. 사진이 그 자체로 보이지 않듯 물도 그 자체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물을 찍으면 그것이 그대로 '사진을 찍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70대부터 한정식 선생님은 '물'을 찍으러 가셨어요. 우리가 '물을 찍으러 간다, 바다를 찍으러 간다, 계곡을 찍으러 갔다' 하면 바닷가의 멋진 풍광이나 계곡의 모습을 떠올리지만, 한정식 선생님은 거기에 '고요'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거기가 곧 사진이라고 생각하셨던 거예요.
우리가 걸려 있던 사진들을 보고 "저거 어떤 동해 바닷가 풍경이네"라고 이해하는 것은 이미지가 가진 표피적인 것, 이미지의 해석을 통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지, 그것을 만든 사람의 본질·생각은 '저것은 물이 아니라 사진이다'였습니다.
문제는 그 '고요' 자체의 경지다. 자꾸 돌이 보이고 풀이 보이고 물이 보인다. 물을 바탕으로 돌과 풀을 통해 '고요'를 찾으려 하지만, 내가 찍고자 하는 것이 돌이 아니고 풀이 아닌데, 돌과 풀만 찍힌다. 소재가 눈에 띄지 않아야 하는데, 소재만 보이는 것이다.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자꾸 '소재'에 잡힌다. 내 스스로가 더욱 깊이 가라앉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내 사념이 깊지를 못한 탓인가 보다. 보이지가 않는다. 초조한 것은 아니면서도 안타깝다.
무언가 보일 듯 하면서도 보이지 않고, 잡힐 듯한데 아직은 잡히지 않는다. 곧 잡힐 것 같고 열릴 것 같으면서도 ― 어쨌든 그 문이 한 번 열리면 더 깊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기도했다. 고요의 그 깊은 침잠 속으로 빠지게 하소서.
60대 중반, 70을 앞두고 이런 글을 쓰셨다는 것은 ― 우리가 지금 바깥 세계를 인지하고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모습이잖아요. 끊임없이 바깥의 '무엇'이 아니라 안으로 '그것'으로 향하는, 자신만의 질문과 답을 찾으려 하셨던 것입니다.
'고요'의 완성은 ― 한정식 선생님의 마지막 글들을 보면 ― 본인은 결국 완성하지 못하셨다고 하세요. 완성하고 싶었지만, 그 안에서 자기 스스로의 단점을, 결국 자신을 바라보고 싶었던 그 지점까지는 가지 못했다고. 그리고 "이제 아프니까 다시 아이처럼 돌아간다"고 하셨어요.
그러나 그 한 점이 ― 점으로서가 아니라 ― 적어도 제게는 빛나는 별처럼 다가옵니다. 그 빛이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그 빛이 무엇인가, 그 빛은 어떻게 있는가, 그것이 왜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생각하게 해 주시기 때문에, 당신께는 미완이었지만 제게는 '고요'라는 세계를 그분이 만드셨다고 생각합니다.
"존재는 아름답다.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존재가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다." 2002년 처음 발표된 첫 〈고요〉 연작.
한정식 선생님은 일기에서 끊임없이 기도하셨어요.
늘 기도했다. 기도한다고 주어지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그 정신적 집중이 무언가 하나를 만들어내고야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는다. 그냥 운이 좀 좋았으면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부처님께 기도하며 "부처님, 눈 좀 뜨게 해 주십시오" 하는, 인간의 나약함. 하지만 정말 그것을 추구하고 싶다는, 그것을 보고 싶다는 그 욕망.
도울(김용옥)을 언급한 부분도 있습니다:
사진도 물·강·풀잎·돌 외에 부처님의 얼굴을 그려내고 싶은데, 부처님이 내 얄팍한 기도로 모습을 통해 드러내실 분도 아니고, 무엇보다 부처님은 형상을 하고 계신 분이 아니시니, 참 진실로 답답하다. 마음을 비워야 한다고 ― 나도 마음을 비워야 함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울 선생처럼 나도 이 '이상'에 묶여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으니, 마음은 비워지지 않고 머리만 변하는 느낌이다. 슬프다, 내 몰골이여. 도울이 내 못남을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다.
자기 성찰이 좀 과도하잖아요. 그렇죠. 자기 성찰이 과도하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결국 누군가가 자신이 바라보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하면 바깥은 안 보이잖아요. 그것만 보이죠. 그것을 보는 내가 보이고, 그것에 좁혀지지 않는 거리감을 통해 나의 한계를 느끼게 되고, 그것이 인간적 욕망과 노력만으로 넘어서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초창기에는 '그것을 완성하고 만드는 것'에 집중하셨다가, 시간이 짧다는 것을 의식하시면서 ― 수도학적으로 그 도(道)에 가는 것은 힘들지만, 그런 부분들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 그래, 내 사진에 필요한 것 ― 내가 진행할 곳은 바로 '침묵'이구나, 깨달았다. 2천년 후의 어느 시점이면, 단아함이나 외형적 아름다움에 그치지 않고 그 무거운 침묵이 흐르는 사진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식적인 침묵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침묵. 그러면서도 말보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는, 그러한 사진이 내 사진이 지향하는 바가 되어야겠다. 그럴 때 거기에 무게와 깊이가 생길 것이다.
이제 현장에 나가서 급급히 찍기보다는 들여다보기·명상하기에 시간을 더 내어야 할 것 같다. 그러는 중에 눈에 들어오는 것을 찍으면, 내가 밤낮 찾고자 하는 부처님이 거기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을까 싶다. 그건 '부처 찾기'인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의 작품, 누군가의 세계를 본다는 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는 일이지요. 한정식 선생님의 작업이 어려운 이유는 사실 그 사진 자체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가 추구했던 것 ― 그 사진이 추구하는 것 ― 을 알기 위해서는 그가 가졌던 시간에 대한 이해, 시간 안에서 가졌던 모습에 대한 이야기, 그가 던졌던 질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있을 때 비로소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사진 한 장이, 사진이 아니라 '그의 시간과 그의 이야기'로 들리게 됩니다.
늙어가는 마음을 더 비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진에서조차 나를 비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마음만이 아니라, 찍지 않는 그런 경지에 이르고 싶다. 이 또한 지평을 하나 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욕심이다. 시인의 말처럼 "꽃이 아니라 향기가 있게 하라"의 경지에 이르고 싶지만, 어쩌면 향기에서조차 벗어나는 길이 있지 않을까. 지금 내 작업도 '최소한의 것을 찍는 것'이다. 그것이 내 채집·채취와 맞는다. 찍대 찍히긴 찍혔으되 아무것도 찍혀 있지 않은 그런 경지, 그것이 무엇일까. 동양적 몰입, 무언(無言)을 생각했지만, 무언가를 찍는다는 것·찍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진적 강박 관념에서 벗어나는 길을 열고 싶기도 하다. 시간을 초월한 내 사진의 세계를 열고 싶다.
나이가 들수록 "뭐 뭐 하고 싶다"는 글이 계속 나옵니다. 그게 한편으로 존경스러워요. '고요'라는 작품 세계를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생의 말년에 ― 몸이 늙어가는 그 순간, 움직이기 힘든 그 순간에도 ― "무언가 내가 바라보고 싶은 것에 다가가고 싶다, 그것이고 싶다"는 이야기를 끊임없이 자기 채찍처럼 일기에 적으셨다는 것이.
그 결과물이 지금 저 아래에 있는 사진들입니다.
여전히 '고요'는 여운의 문제와 깊이의 문제에 부딪혀 있다. 무엇보다 내 안의 예술, 사진이라는 것이 결국은 장식상(裝飾相)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내게 있어서 예술은 무언가 아름다운 것, 무언가 새로운 것, 또 무언가 꿈 같은 것에 머물러 있는 것 같다. 나는 철학적이고 사색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살아왔다. 예술은 내게 여가이고, 오락이고, 위안의 범위를 넘지 않았다. 그 연장선에서 내가 아직 서 있는 것 같아, 여기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결국 사진에서 그 답을 찾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싶다. 나는 아직도 더 잘할 가능성이 있다고 스스로 믿고 있다. 무엇보다도 나를 채찍질할 때 채찍질하는 내가 있으니, 내가 더 잘할 것이다.
매일 기도하며 "사진이란 이런 거야" 하고 눈앞에 확 열리기를 빌고 있다. 너무 늦은 기도일 것이다. 이제 겨우 사진이 보여서 어쩌란 말인가. 그러나 나는 아직도 사진이 무엇인지, 왜 내가 사진에 이렇게 열중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가 찾고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인지 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분명 나는 찾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장면도 일기에 적혀 있습니다:
부처님께 무릎을 꿇고 절을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솟았다. 이게 뭡니까? 도대체 내가 왜 여기 왔습니까? 눈물을 억지로 채웠다. 가슴이 아파한다. 나는 무엇을 찾아 여기 온 걸까? 이 밤바람 부는 산골에 무얼 찾아 이렇게 홀로 앉아 있는 것일까. 아침에 부처님 앞에 꿇어 엎드렸을 때 그렸던 눈물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나, 무엇이 안타까운 것일까?
길 위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던 그 길 위에서 가졌던 상념들. 어느 날은 해맑은 아침 햇살이었다가, 어느 날은 폭풍우 치는 절망적인 흐린 시간이었습니다. '무언가 오늘 이것을 알아야 하고, 내일은 무엇을, 그래서 무엇을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추구의 방식이라면, 한 개인이 자신의 본질·자신을 찾아가는 길은 그만큼의 시간을 쏟으며 끊임없이 동일한 질문을 던져야 하고, 찾지 못하는 답을 억지로 갈구해야 하는, 그런 시간을 견디는 일입니다.
한정식이라는 분은 인생 후기 이후, '사진가로서의 모습'이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 본연적으로 열망하는 자기의 모습'을 찾으려 했던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해주고 계신 것입니다.
설악산에 가신 일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어요:
도대체 이게 뭘까. 왜 이리 방황하는 걸까. 90년대 중반에는 '이제 좀 알 것 같다, 이렇게 가야겠다' 했는데, 2천년이 넘어서 오니까 도대체 이게 뭘까, 왜 이리 방황하는 걸까. 무언가, 나, 그립기만 하다. 실체 없는 그리움이 가슴이 매일 때가 많다. 설악산을 향해 차가 달릴 때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한숨을 짓기도 했다. 한계령 그 아름다운 고갯길을 꼬불꼬불 돌며 눈물이 돌기도 했다. 그래서 떠난 것이기도 하다. 사진을 찍으러 왔어야 했던 것인데, 그러나 슬펐다. 걱정이 있는 것도 아닌데, 슬픔이 언제나 내 가슴 밑바닥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게 바로 내 영혼 스타일이라는 걸까. 끝도 없이 떠도는 헤매는 그런 자가 되어, 끝도 없이 헤매고만 싶은 심정이다.
당신께서는 이런 시간들 안에서 스스로의 한계를 인지하셨던 것 같아요. "무언가 하면 될 것이다, 무언가 노력하면 만들어질 것이다"가 아니라, "그것은 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노력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가능하려면 우리가 우리의 익숙한 삶의 방식과 다르게 무언가를 경험하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어떤 삶 ― 현실적인 삶과 추구하는 삶 ― 사이의 간극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셨던 것입니다.
아침에 금강경을 읽다가, 모두 다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은 다만 묵묵할 뿐, 그저 말없이 있을 뿐인데, 거기 사람들이 들러붙어 '사진이네, 그림이네, 음악이네' 하고 더치(?)를 치고 개치(?)를 치는 게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위대한 자연 앞에 그저 묵묵히 있다가 가는 게 보다 격이 있는 짓이 아닐까. 자연은 이렇게 위대한데 이 세상은 이렇게 참 멋진데, 사람들은 이 무슨 좀스러운 짓인가 싶었다. 그저 하늘 쳐다보고 웃고, 돌·물 바라보며 미소 짓고, 바람 따라 마음 시원히 열어놓고 살면, 그게 바로 예술이요 도가(道家)의 무지가 아닐까.
요즘 식으로 보면 "이게 무슨 예쁘다 예쁘다 같은 소리야"라고 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 있다는 것 ― 여기 계신 분들 중에도 그런 분이 있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인간 정신이고, 인간 정신이 그렇게 작동하는 것이 곧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2002년 일기에는 "내 세계의 문이 열리는 느낌이 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나 스스로가 내가 들어가고자 하는, 열고자 하는 세계의 입구에 서 있는 생각이 든다. 사진을 위해 나를 누구보다 깊이 고요하게 침잠해야 할 것 같다. 보다 마음을 가라앉혀 조용히 들여다본 그런 눈으로 다시 바라보고 싶다. 사물이 가지고 있는 존재감, 존재를 순수하게 존재로 바라보는 ― 아무런 욕망의 그림자가 끼이지 않도록. 홀로 있음, 그 적정의 세계를 나는 사진으로 옮기고 싶다.
사물을 찍되 사물에 의지하지 않고, 사물이 아니라 사진만이 보이는 그런 사진을 이루어 놓고 싶다. 그런 존재론적인 접근으로 이루어질 것 같아 ― 산속에 들어가 매일 자연을 바라보며, 풀을 들여다보며, 사람 가운데 내 몸과 마음이 동화되고, 찍기만 하면 풀내음 · 흙내음이 나고 '사진의 냄새'가 나지 않는, 그러한 사진을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무언가를 찍되 그것이 찍히지 않고 사진이 찍히는, 그런 사진이 결국 내가 세운 내 목표이다. 이번 사진들이 그 입구에 서 있는 것 같다.
이때부터는 '추상의 추구' 또한 새로운 욕망이 됩니다:
그동안 시간이 지나서 사진에서 이루지 못한 꿈을 이제 이룰 생각으로 정말 꿈꾸고 있다. 욕망이 다시 또 가장 지(止)하는, 내가 사진을 이루겠다는 ― 이제 열리기 시작한 적정(寂靜)·적멸(寂滅)의 세계를 사진에서 완성시키고자, 사진의 진정한 추상을 이루어 보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단순한 수단만이 아니라, 대상을 넘어서는 ― 그림이 대상을 벗어나듯, 사진 또한 대상의 사슬에서 풀리는 길을 나름대로 모색하고 있다. 그것을 사진으로 읽고 싶다. 부처님을 내 사진에 모시고 싶은 것이다. 부처님은 어떤 형태가 아니니,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어렵지 않은가.
이제 문을 열었으니 보다 넓은 길을 닦아, 찍기만 하면 거기에 적정·적멸의 경지가 보이고, 그런 사진을 다음 전시와 책에서 보여주고 싶다. 이 소원은 꼭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늘 내 사진에 대해 반성하고, 생각하고, 궁리하고, 기도하고 있으니 ― 늦어도 80까지는 이루어질 것 같은 생각이다.
재미있게도, 3~4년 후의 일기를 보면 다시 좌절에 빠지십니다. 그래서 제가 이런 일기들을 연대순으로, 반복적으로 보여드리는 이유는 ― 어떤 분이 특정 시점에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만 전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추구하는 사람의 시간 안에서, 그가 가진 '고요'라는 세계관과 그것을 보고 싶고 완성하고 싶었던 마음이 어떤 과정 위에 놓여 있었는지를 보여드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좀 더 외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면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사진 찍고 생각하고 책을 읽으면서 '나'를 다지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혼자 있으면서 외로움 속에서 나를 이루어가야 할 것 같다. 다행히 요즘 내 사진의 길을 찾았고, 거기에 친절한 생각이 있다. 보다 내 안으로 내가 깊이 빠지기 위해서 외로워야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많은 시간을 나와 사진만, 자연만 들여다보아야 뭐가 보일 것 같다. 지금처럼 이런저런 일로 이렇게 바쁘게 살다 보면, 아무것도 되는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문장이 제일 중요합니다. "지금처럼 이런저런 일로 바쁘게 살다 보면 아무것도 될 수 있는 것이 없다." 무언가를 ― 더군다나 자신의 것을 ― 완성한다는 것은 외로운 시간을 대면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외로운 시간을 가져야 그 외로움 속에서 자신이 보이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보이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이야기를 스스로가 듣고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절을 찾아야겠다. 절 근처에는 반드시 물이 있으니, 절을 찾으면 부처님께 절도 올리고, 물도 찾고, 다시 깊이도 찾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가능한 한 외부와의 접촉도 줄여야겠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사진이라는 게 '절대 고독의 세계'라면, 그것은 안으로 침잠해야지 밖으로 번지면 안 되는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제도 문득 생각이 들었다. '빛'이라는 것. 내가 말해왔던 '빛의 자율성'을 세우는 일은 결국 그 빛 자체를 내가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그도 그래도 결국은 '빛으로 빛을 살리는 것'이다. 그 빛을 조금 더 순수하게 하는 작업 ― 그 빛이 결국은 기독교적 '말씀'의 세계, 불교적으로는 사티(Sati)의 경지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게 보통 일이 아닐 것이다. 보다 순수하게 빛을 살리는 길, 빛으로 빛만으로 방을 꾸미고 책을 꾸미되, 그것이 '기도 묵상의 경지', '적정 적멸의 경지'가 느껴지도록 ― 그게 그렇게 쉽게 될 일이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고 노력하면 드디어 잡힐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제 겨울이다. 겨울철에 물러서 빛은 더 빛난다. 나는 노력할 것이다.
둘째로, 불교적인 사유에 대해 이렇게 적으셨습니다:
근본적으로 내 마음에는 불교에 대한 신뢰감이 있는 것 같다. 이상하게도 불교가 점점 좋아지면서, 작은 일에 감동하고 수긍하게 된다. 무엇보다 절감되는 것은 '불교는 그대로 사진이라는 점'이다. 원택 스님의 글 ―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 ― 를 읽다가, "그래, 그거야! 사진이 그 무엇 ― 보아도 보이지 않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 사진이 찍히나 ―" 하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아프기도 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끌린다. 내 사진에 불교적 냄새가 나길 원하는데, 온통 내 화두가 '불교'여야 하는구나 싶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매일 아침 금강경을 필사하시기 시작합니다. 사실 사진을 찍거나 작품을 만드는 것과 직접 관련은 없잖아요. 절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사진 작업과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 '삶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우리가 현상을 보여주는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면' ― 우리는 일반 사진가들이 대응하는 방식과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했고, 때로 그것이 수행적 태도였으며, 때로는 직접 사진을 찍는 행위가 아니라 스스로 안으로 침잠하고 가라앉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 한 편의 좋은 ― '나를 이야기할 수 있는 점 하나'를 점으로서 보여줄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일기는 2007년경까지 본격적으로 이어지고, 그 이후로는 병상의 일기를 쓰시기 시작합니다. 병상의 일기는 사실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지금까지 보신 글들은 거의 그 전까지 기록으로 남아 있는 거의 전부입니다.
어떻게 해야 '고요'가 고요로 올까. 이제야말로 '찍는 것·찍을 것'부터 찾아 헤매지 말고, 차분히 바라보는 마음부터 길러야겠다. 물이 내게 말을 들려줄 때, 찡한 고요가 느껴질 때, 그때까지 기다릴 줄도 알아야겠다. 아무것도 못 찍으면 어떠랴. 종일 불 꺼 앉아, 또 절 마당에 앉아 '고요'만 즐기다 와도 그게 얼마나 행복한 일일까. 그러면 또 고요가 찍히기도 할 것이다.
사진 자체를 시집(?)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2012년까지는 직접 사진 촬영을 하셨지만, 어느 시기부터는 사진을 찍으러 전국을 다니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수행적 태도'와 '시간'을 갖기 위해 사찰·바다·산을 가셨습니다.
창조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된다면 누구나 다 관세음을 만들었겠지만 ― 그러나 나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일종의 핵심이, 한 가닥의 하두(?)가 어젯밤에 떠오른 '열반 적정(涅槃寂靜)의 고요'였다. 다만 존재론적 차원의 영상에 어떻게 '죽음의 이미지' ― '적멸의 이미지' ― 를 집어넣느냐가 문제이다. 이것이 당분간 매일 하루가 되고, 앞으로의 숙제가 될 것이다.
저녁에는 '하두를 자꾸 정전(?)하다가 못 깨다'는 스님들의 그 참선 경계에 내가 들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선이 꼭 가부좌를 틀고 눈 감고 앉아 있는 것은 아니니까, 사진 찍으면서도 화두요, 자면서도 화두요, 화두를 놓지 않을 것이다. 하나만 더 해야 된다. 일단 '고요'를 나는 다 해야 한다. 하고 싶은 것이다. 분명 내가 찾아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있고, 불교 공부에서 보람을 보면 찾을 것 같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아무도 이루지 못한 일 하나를 이루는 일 ― 그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곳이 그곳, '고요'의 곳이 아닌가 싶다. 명상적이고 불교적인 생각이 보이는 사진, 동시에 '사진적 추상'을 이룬 사진, 삶의 존재 깊은 의미를 또는 존재 자체를 복원시킬 수 있는 사진 ― 그것이 예술로서, 사진으로서 내가 이를 목표의 지점이다.
재미있게도, 이런 수행적 태도와 명상적·관념적 글에도 불구하고 한정식 선생님이 남기신 사진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사진도 상당히 많습니다. 이는 그분의 작품론과도 연결되는데요, 당신 스스로를 '사진가'로 규정하셨을 때, 또는 '고요' 자체를 정신적 관념으로 사유하시는 지점은 한정식 사진가에게 매우 중요한 축이었지만, 우리의 생각이 늘 동시에 여러 갈래로 존재하듯, 한정식 사진가의 작품 안에도 그 두 축이 함께 있는 작업이 있고, 동시적으로 가졌던 상념·단념·욕망·사진적 시도들 ― 그런 작업들도 항상 함께 해오셨던 것입니다.
재미있게도 한정식 선생님은 일기에서 끊임없이 관념적·정신적 세계를 추구하셨지만, 그분은 한국 사진계에서 사진가로서 자신의 작품을 계속 발표하는 분이셨어요. 이는 어디서 오는가 하면, 평생을 스스로 '사진가'로 이야기했던 자기 삶에 대한 태도에서 옵니다.
"내가 살아온 시간에는 수많은 동시적 상념·잡념·욕망·다른 무엇도 있었지만, 내가 평생 나를 사진가로서 이야기했고, 사진 예술론의 발제자로서 살았던 사람과 차이를 만드는 것은 '발표' ― 그것을 발표하지는 못했다는 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초기 70년대 입작들을 정리하다 보면, 한정식 선생님은 사실 매우 현대 사진적이고 아방가르드한, 실험적인 작업도 상당히 많이 하셨어요. 그것들을 발표하지는 못하셨던 거죠.
자신이 가장 교육자로서 이야기한 지점들, 사진 예술에 대해 논했던 지점들 ― 이 모든 것이 함께 존재하다 보니, 그분의 결과물은 끊임없이 열려서 훨씬 다양하고 차이가 있는 것을 만들어내셨지만, 실제 '고요'라는 지점은 그동안 〈고요 I, II, III〉으로 발표되었던 것들이고, 결국 이런 이야기들을 동시에 가지고 있되, '대상·존재 자체에 대한 존재라는 키워드'로 '고요'를 이야기해 오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시는 후기의 작업들은 2007년 이후, 마지막 〈고요〉 발표 이후에 발굴된 작업들이고요. 오히려 일기에서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정신적·관념적·명상적' 지점은 2000년대 중반 이전 작업이 아니라, 오히려 2000년대 후반에서 2012년까지의 작업에서 더 잘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한정식 선생님의 작품집을 보면 〈고요 I, II, III〉이 있는데, 돌아가신 후 새롭게 발견된 작품들을 모아 만든 작품집의 제목은 "공(空)은 열려 있다(The Emptiness is Open)"입니다. 이 제목은 일기의 한 구절에서 나왔어요:
모든 존재의 근원이면서 동시에 종말인 거기에, 공(空)은 열려 있다.
사실 일기의 그 문구들을 이해하는 게 어려웠어요. 한정식 선생님은 불교 대학을 다니셨거든요. 자신의 '고요'라는 세계를 바라보기 위해 불교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불교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셔서 불교 용어를 많이 쓰셨습니다.
처음에는 그런 질문을 숱하게 했어요. "적멸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하는데, 그 적멸이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 한 번도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그런 질문을 하다가 ― 그것을 학문적·불교적 접근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한정식이라는 한 사진가가 살아온 시간과 시간 속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니까, '아, 이게 이거구나' 싶어졌어요.
본인의 작품을 '완성'이라는 단어로 보지 않으셨던 거예요. 세계는 열려 있는 것이고, 세계를 끊임없이 찾으려고 하셨지만, 한 도(道)로는 '세계가 열려 있다'는 것을 마지막에 이야기하셨다는 것 ― 그것이 실제 '고요'라는 것을 ― 처음 제가 한국 사진 예술 또는 사진 예술 작품으로 바라봤던 초창기의 이해와 달리 ― '누군가가 추구했고 누군가가 존재하고 싶었던 모습'으로서 바라봐야겠구나 하게 만들었습니다.
설악산에 계실 때의 시(詩) 한 구절을 옮겨드리면:
내가 절을 찾는 것은 절이 좋아서이다. 절이 좋은 것은 그 '고요'로 해서이다.
한편으로는 부처님께 기도하기 때문이고, 또 한편으로는 ― 사실 절 자체가 꼭 고요하지는 않잖아요 ― 자신의 고유한 상태로서 '고요함'을 경험할 수 있는 환경으로서, 그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환경으로서 끊임없이 산과 사찰을 돌아다니셨던 것 같아요.
시간의 존재는 그 모습을 보고, 생선 풍대(?)를 벗어나, 그때도 사라지고,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를 나는 '고요'로 부른다.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는 그런 경지" ― 이 나이가 되니 어렴풋이 그것이 무엇인지 알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어렴풋이 이해는 되지만, 여전히 저는 이 삶과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그 상태가 되어지기는 힘들거든요. 아마 여기 계신 많은 분들도 비슷할 거예요.
이해는 되지만, 결국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내가 거기 있어야' 합니다. 내가 그것으로 존재해야 하는 거고, 사진적 질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 안의 본연의 질문에 내가 마주해야 하는 것이지요. '고요'라는 것은 '우리의 고요'가 아니라, 인간이 마음에 숨겨두었던 '그 마음 자체'입니다.
그리고 점점 시간이 지나면 ― 이 일기는 2007년 정도까지 본격적으로 쓰이고, 그다음에는 병상의 일기로 옮겨갑니다. 병상의 일기에는 사진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나오지 않아요.
매주 점심을 함께한 3년의 마지막 시간을 저는 잊지 못합니다. 훌륭한 노교수, 한국 추상사진의 거장, '고요'의 미학을 만든 사진가의 얼굴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몸이 약해지면서, 그 얼굴은 점점 순수한 아이의 얼굴로 돌아갔어요. 아프고 명확해지면 그렇게 되더군요. 사진가도 아니고, 고요의 추구자도 아닌, 그저 한 사람이 되는 시간 ― 이러한 모습을 동시에 경험하면서, '고요'를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그 고민에서 제가 얻은 결론은 이렇습니다. '고요'라는 작품 또는 작품 세계를 '사진적으로 훌륭한, 우리가 바라봐야 할 예술 작품'으로서가 아니라, 순수한 인간이 자신의 걸음을 뚜벅뚜벅 걸어오며 바라본 세계의 단면이자, 그 세계를 보고 싶었던, 이야기하고 싶었던 모습으로서 ― 그 한정식이라는 한 인간을 그 자체로서 바라봐야 한다.
아마 많은 분들이 한정식 선생님이 쓰신 글이나 작품을 경험해 보셨을 거예요. 보신 분도 있겠지만, '한정식닷컴(hanchungshik.com)'이라는 홈페이지를 작고하신 후 제가 만들어서 여러 자료를 업데이트·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중심은 훌륭한 사진 작품을 소개하기보다는, '고요'라는 세계가 만들어진 것이 한정식뿐 아니라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 사진을 통해 나를 실현하거나 사진을 통해 나의 것을 이루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작업이란 무엇이고 작업자의 길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나의 삶 안에서 우리의 삶 안에서 어떻게 다가올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정식닷컴에서는 '내가 절을 찾는 이유', '고요의 길', '풍경론', '나무 사진과 현실', '외로운 길', '수상(隨想) 사진에 대한 연구' 같은 텍스트 자료들과 책·동영상 자료들을 보실 수 있어요. 올해 하반기에 두 번째 홈페이지 업데이트가 예정되어 있는데, 그동안 새롭게 발굴한 작품과 정리한 자료들을 올릴 예정입니다. 그런 자료들을 한 번 살펴보시면, 오늘 제가 81분 동안 드린 이야기보다 훨씬 더 한정식이라는 사진가가 걸어왔던, 또는 다가가고 싶었던 그 세계가 무엇인지를 좀 더 잘 아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혹시 질문 있으신가요?
한정식의 언어, 그리고 한국 현대사진의 어휘
| 용어 | 설명 |
|---|---|
| 고요 (古諭) Goyo · Serenity | 한정식이 1990년대 말부터 평생의 화두로 삼은 미학적·정신적 경지. '적정(寂靜)', '적멸(寂滅)'의 동의어이자, 사진의 '제3의 의미'로 가는 통로. '고요'는 동시에 그의 호이기도 했다. |
| 사진적 추상 Photographic Abstraction | "사물을 찍되 사물이 느껴지지 않고, 형태가 아니라 느낌이 먼저 다가오는 사진." 사물의 제1의 의미를 벗어나 제2·제3의 의미를 창출할 때 도달하는 경지. |
| 스트레이트 포토 Straight Photography | 스티글리츠가 개념화한 사진관. 촬영 이후의 모든 개입을 배제하고 셔터 그 자체로 작품을 완성하는 태도. 한정식의 평생의 작업 방법론. |
| 형식주의 사진 Formalism | 스트랜드·웨스턴·시스킨드·마이너 화이트로 이어진 미국 모더니즘 사진의 한 축. 한정식은 이를 '한국적 정서'와 '여백의 미학'으로 토착화시켰다. |
| 제법부동본래적 諸法不動本來寂 | "모든 법(현상)은 움직이지 않고 본래 고요하다." 한정식이 인생 말년에 '고요'의 미학을 설명하기 위해 끌어온 불교 세계관의 핵심 구절. |
| 적정 적멸 (寂靜 寂滅) Stillness · Nirvana | 한정식이 '고요'와 동의어로 사용한 불교 개념. 모든 움직임과 번뇌가 그친 궁극의 침묵 상태. 후기 일기에서 "내가 이루고자 하는 궁극"으로 거듭 등장. |
| 공상 (空像·空相) Empty Image / Co-existence | 독립큐레이터 최연하가 한정식 만년 작업을 명명한 표현. '텅 비어 있는데 무언가 드러나는 상(空像)'과 '모든 상은 상호 연결 속에서 일어난다(空相)'는 이중적 의미. |
| 관조 (觀照) Contemplation | 주관성을 배제하고 대상의 편에 서서 사물을 응시하는 태도. 〈풍경론〉(1990년대)에서 처음 도입돼 〈고요〉로 이어진 한정식의 후기 작업 방법. |
| 금강경 (金剛經) Diamond Sutra | 한정식이 매일 아침 필사한 불경.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는 가르침이 '사물을 벗어남으로써 추상에 이른다'는 그의 사진관의 직접적 원천. |
| 한국현대미술작가 MMCA Contemporary Artist | 국립현대미술관이 2015년 한정식을 5인의 '한국현대미술작가' 중 한 사람으로 선정. 2017년 과천관에서 〈한정식 — 고요〉 대규모 회고전이 열렸다. |
강연의 행간을 읽고, 한국 사진사의 좌표 위에 한정식을 다시 놓는다
강연은 한정식을 '동양적·불교적 사진가'로 그리는 데 집중한다. 그러나 그를 가능하게 한 또 하나의 축은 1970년대 한국 사진계에서 미국 형식주의(American Formalism)를 '굴절 없이' 수용한 거의 유일한 작가라는 사실이다.
당시 한국 사진은 회화주의 살롱사진과 '생활주의 리얼리즘'으로 양분되어 있었다. 박주석(사진평론가)이 지적했듯, 한정식과 같은 세대가 형식주의를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사진매체의 예술적 가능성'이 확장됐다. '고요'가 동양적이라는 평가는 옳지만, 그 형식의 정직성이 없었다면 '고요'는 단순한 명상 이미지로 그쳤을 것이다.
20만 컷의 미발굴 필름, 60년대부터의 일기. 강연자 이일우가 직접 정리한 이 유산은 한국 현대사진사에서 보기 드문 규모의 1차 자료다. 그러나 동시에 '제자이자 큐레이터'가 단독 해석권을 갖는 구조이기도 하다.
'선택받지 못한 필름'을 '공상(空相)'으로 재해석한 최연하의 명명은 탁월하지만,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는지 큐레이터의 시선이었는지를 구분하기는 어렵다. 작가 사후의 미발표작을 '사후 작품집'으로 묶을 때 따르는 윤리적 긴장 ― 한정식의 '선택'과 우리의 '해석'이 어디서 갈라지는가 ― 은 이 강연이 정면으로 다루지 않는 부분이다.
강연에서 가장 자주 반복되는 한정식의 일기 문구는 "더 외로워져야겠다"이다. 이는 미학적 결단인 동시에, 노년의 사회적 고립이기도 했다. 강연자도 인정하듯, 그것은 "과도한 자기 성찰"이었다.
이 지점은 한정식 개인의 미학을 넘어, 한국 남성 예술가 1세대의 노년이 가진 보편적 형식을 보여준다. '예술의 완성'이라는 이상이 가족·동료·사회와의 관계를 '방해 요소'로 치환할 때, 그것은 미덕인가, 한계인가? 강연이 깊이 다루지 않은 채 남겨둔 질문이다.
강연 초반, 이일우는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히 털어놓는다. 독일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자신의 '머리'는 서구를 향하고, '몸'은 이 땅에서 자랐다는 부딪힘. 그것을 알게 한 것이 한정식의 '고요'였다는 고백이다.
이 강연은 결국 두 개의 텍스트가 겹쳐 있다. 표면적으로는 '한정식 작품론'이지만, 내면적으로는 '한국에서 현대미술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강연자 자신의 답이기도 하다. 그 이중성을 알고 들으면, 강연은 훨씬 더 풍부해진다.
'공은 열려 있다(The Emptiness is Open)'는 마지막 작품집 제목은 한정식의 미학을 가장 정확히 요약한다. 완전한 고요가 '소리의 부재'를 전제하듯, 완전한 추상은 '형상의 부재'를 전제한다. 그러나 사진은 사물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이 모순을 한정식은 풀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비우면서 채워나가는 운동'으로 평생을 살았다. 박평종(사진비평)이 지적했듯, 〈고요〉가 추구하는 경지는 일종의 메타포이며,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미완은 결함이 아니라 형식이다. 이것이 한정식이 한국 추상사진에 남긴 가장 깊은 유산이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만나도 만나지 못하니
옛날이나 지금이나 한탄스럽고 한탄스럽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자신만의 '고요'를 열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