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s
Source 20260523 - 육명심.txt · 강연 음성 기록 · 57분 19초
A Lecture · 2026.05.23 · Museum Hanmi

도시의 틈새에서
토박이들의 삶으로

사진가 육명심(陸明心)의 60년 — 김계원 교수의 작가론 강연. 인상에서 영상 사진으로, 예술가의 초상에서 백민과 장승으로. 한국 압축근대의 지배선 너머, 카메라가 건져 올린 틈새의 풍경들.

Date 2026년 5월 23일 토요일
Venue 뮤지엄한미 삼청 본관
Exhibition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Duration 57분 19초
01 / Synopsis

강연의 요지

  1. 이 강연은 작년 작고한 사진가 육명심(1933–2025)의 작품 세계를 추모하는 자리다. 김계원 교수는 10여 년 전 작가론 논문을 처음 썼고, 언젠가 인터뷰를 하리라 미뤄왔으나 그 기회는 끝내 오지 않았다.
  2. 육명심은 한국의 압축근대화 한가운데를 카메라와 함께 살았다. 그러나 변화의 정면이 아니라 변화가 파열되는 자리, 잘 보이지 않는 틈새를 포착한 데 그의 독보성이 있다.
  3. 출발점은 1965년, 사모님 이명희를 통한 사진 입문이었다. 영문학과 출신,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제자, 신학을 향한 갈망 — 사진가 이전의 삶은 문학과 종교 사이에 있었다.
  4. 1960년대 말 인상(영상 사진) 연작에서 그는 도시의 그림자·반영·잘려나간 앵글로 서울의 또 다른 얼굴을 그렸다. 같은 시기 일본의 프로보크 세대와 공명하지만, 그것은 영향 관계라기보다 동시대성의 산물이다.
  5. 1970년대 예술가의 초상, 1979년 이후 백민·검은 모살뜸·장승 3부작으로 이어지며 그의 시선은 도시에서 토박이의 얼굴로 이동한다. 박정희 정권의 전통 만들기 바깥에서, 그는 민중도 서민도 아닌 백민(白民)이라는 자리를 발명했다.
02 / Dramatis Personae

두 사람의 초상

강연의 대상 · 사진가

육명심陸明心

1933 대전 — 2025.10.15 서울 · 향년 92세

한국 1세대 사진가, 사진 이론가, 교육자. 《백민》 《예술가의 초상》 《장승》의 작가.

학력
대전사범학교 졸업(1951) / 연세대학교 영문학과(1955 입학, 1961 졸업) /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경력
1965년 사진 입문 / 서라벌예술대(1972~75) · 신구대(1975~81) 교수 / 서울예술대학 사진학과 교수(1981~정년) / 홍익대·상명대 강단
저술
《한국현대미술사 — 사진편》(공저, 1978) / 《세계 사진가론》(열화당, 1987) / 일본 사진사 번역(1980)
대표 연작
인상/영상 사진(1967~) · 예술가의 초상(1973~) · 백민(1979~) · 검은 모살뜸(1983~) · 장승(1985~)
수상
2016 은관문화훈장 / 1956 제1회 연세문학상
한국 모더니즘 사진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 백민 정신 35mm 스냅 사진 = 소통
강연자 · 미술사학자

김계원金桂沅

성균관대학교 미술학과 부교수

사진사 전공의 미술사학자. 한국·일본 근현대 시각문화 연구.

전공
사진사, 물질문화연구, 전시론, 한국/일본 근현대미술 및 시각문화
학력
연세대학교 학사 / 중앙대학교 석사 / 캐나다 맥길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
경력
2013~2015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 어네스트 웰치 미술·디자인 학부 조교수 / 현 성균관대 미술학과 부교수
저서
《사진 국가 — 19세기 후반 일본 사진(들)의 시작》(현실문화A, 2023) / 《촉각의 미술관》(공저, 2024)
연구
2025 〈작가 앞에 선 카메라 — 한국현대미술대표작가 100인선집과 사진을 통한 새로운 작가상의 형성〉 등 다수
사진사 물질문화 시각문화 한일 근현대
03 / Transcription

강연 전문

Prologue

꽃봉오리, 그리고 허망함

연 도입부에서 사회자는 이 자리가 지난 10여 년 사이 작고하신 네 분 작가의 삶과 작업을 다시 마주하는 전시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의 일환임을 짚는다. 1부는 김계원 교수가 육명심을, 2부는 이일우 대표가 한정식을 다룬다.

김계원 교수는 자신을 미술사 전공자, 그 안에서도 사진사 연구자로 소개한 뒤, 약 10년 전 살아 계셨던 육명심에 대한 학술 논문을 처음 썼다고 말한다. 자료가 많고 오프닝에서도 자주 뵐 수 있던 분이라 “굳이 인터뷰를 따지 않고 좀 더 객관적인 생각으로 써 보자”고 호기롭게 결심했고, 인터뷰는 언젠가 할 수 있겠지 막연히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건강하시던 분이 작년 가을 갑작스레 별세하셨다는 소식에 그는 깊은 허망함에 잠겼다.

그 사진들은 영원히 정말 빛이 나게 박혀 있어서, 그런 것들이 결국에는 사진 내지는 이미지, 미술 작품이 주는 힘이 아닐까. 선생님들 다 안 계시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남아서 저희에게 어떤 메시지를 계속 전달하고 있구나.

김계원, 2026.05.23 강연 중

전시의 제목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정현종 시인의 시 구절이다. 누구의 선택인지는 모르나 “굉장히 시적이고 뭉클한 느낌마저 든다”고 그는 말한다. 강연은 한 줄의 요약에서 시작한다 — 육명심은 한국의 압축적 근대화·산업화·도시화를 카메라와 더불어 열정적으로 살아간 사람이다.

그러나 그 세대 사진가 누구나 그러했다. 육명심의 특수성은 다른 데 있다. 변화의 정면을 기록해야 한다는 사명감 너머, 다른 사람의 눈에는 잘 띄지 않던 틈새를 날카롭게 포착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그 틈새가 도시의 틈새였고, 1960년대 김현옥 “불도저 시장”이 세운상가·고가도로·강변북로를 세우던 격변기에 카메라는 그 큰 변화를 쫓지 않았다. 변화가 파열되는 자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작지만 날카로운 생명감, 그것이 그의 피사체였다.

Part I

유년에서 입문까지 — 한 페이지의 기억

육명심은 1932년 대전 출생이다(작가 본인은 호적상 1933년으로도 알려져 있다). 김 교수는 작가 인터뷰의 한 특이점을 지적한다. 보통의 작가론은 유년기 — 조부모, 가족사 — 가 정체성을 거의 다 설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육명심의 인터뷰는 어린 시절이 한 페이지가 채 되지 않는다.

아버지는 출가해 스님이 되었고, 작가는 어머니와 큰아버지 댁에서 매우 어렵게 살았다. 1946년 대전사범학교에 입학하며 처음에는 사진이 아닌 연극과 문학에 끌렸다. 어린 나이부터 국악과 판소리의 구슬픈 음악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사범학교 졸업 후 가정 형편 때문에 곧장 교사로 취업했고, 한동안 교편을 잡았다.

그런데 어릴 적 궁핍의 기억과 아버지의 부재 — 일종의 대인 사업(對人 事業) — 때문에 종교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다. 처음 신학대학에 입학했으나, 더 큰 세계에서 본격적인 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갈망에 영어부터 익히기로 한다. 그래서 1955년, 24세의 늦은 나이에 연세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한다. 김 교수는 이를 두고 “지금 보면 흥미로운 일 — 영어를 배우려고, 그러니까 신학을 하려고 목사가 되려고 연세대 영문과에 들어간 것”이라 말한다.

여기서 인생을 바꿀 만남이 일어난다. 영문과 교수로 있던 청록파 시인 박두진이다. 과제를 제출하면 박두진은 “육명심이가 누구냐, 너무 시가 좋다, 어떻게 이런 구슬픈 시를 쓰냐” 하고 칭찬했고, 1956년 작가는 제1회 연세문학상을 수상한다. 졸업 후 동대학원 영문학과 희곡 전공에 입학할 만큼 문학적 소질이 다분했다.

Inflection Point 32세에 한 결혼이 사진 인생의 발화점이 된다. 부인 이명희는 모구회(母丘會) 화가 이동훈의 따님이었다. 모구회는 전후 한국 구상파 화가들이 결성한 그룹으로, 도상봉·이종무·손응성 등 국전의 실세들이 모여 있던 자리다. 집안 차이로 극심한 반대를 받았지만, 스마트한 사위 후보의 모습에 이동훈은 결국 허락한다. 사모님이 당시 취미로 사진을 찍고 있었고, 그 부인을 통해 1965년경 작가는 사진에 입문한다.

사진은 민주적인 매체다. 회화라면 “하루에 한 장씩 그려라”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사진은 배운 그 해에 상을 탈 수 있다. 육명심도 그랬다. 입문한 해부터 공모전 입상이 줄을 잇는다. 1966년 34세, 서울 정동의 배재고등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기며 그는 본격적인 작업기에 들어선다.

Part II

인상에서 영상 사진으로 — 제3의 눈

1967년 사진 입문 약 1~2년 만에, 육명심은 당시 권위 있던 동아국제사진살롱·국전에서 입상하고, 가장 전위적이었던 중앙사우회(CFC)에 출품한다. 이 즈음 시작된 연작이 인상(印象 / Impression) 시리즈다. 인상주의의 그 “인상”이다.

1969년에는 또 다른 전환점이 온다. 당시 한국에는 중앙대 사진학과조차 생기기 전이었고, 사진 교육·이론·역사의 정립이 거의 백지였다. 누군가는 글로 사진사를 써야 했고, 연세대 영문과를 나온 논리적인 글쟁이 육명심에게 그 임무가 떨어진다. 1969년 11월부터 약 2년간 《포토그라피》에 구미 사진사를 연재하면서, 그는 “원래 사진을 했던 사람이 아니었기에 그때부터 열심히 공부”했다.

Notebook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원로작가 디지털 아카이브에는 육명심이 친필로 정리한 〈세계 사진사 노트〉가 남아 있다. 한 장 한 장 사진의 계보가 도표로 그려져 있는데, 그 한가운데 “근대 사진”이라는 핵심 자리가 있다. 그곳에는 두 인물이 놓여 있다. 앙리 카르티에-브레송과 라슬로 모홀리-너지. 한쪽은 결정적 순간의 스냅, 다른 한쪽은 바우하우스 계열의 뉴비전과 카메라 아이. 김 교수는 이 두 계보가 이후 육명심의 시선을 결정짓는 두 축이 된다고 본다.

이 시기 그의 작업은 회화의 시선이 아니라, 카메라만이 줄 수 있는 “제3의 눈”을 향해 간다. 35mm 카메라를 선호한 것도, 카르티에-브레송 식 정교한 스냅 — 그러나 단순한 거리 스냅이 아니라 작가의 시선과 주관적 감정이 깊이 투영된 스냅 — 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그는 큰 카메라는 “성정에 맞지 않다”고 했다.

서울이라는 피사체

새로운 피사체를 찾으려면 보통은 일상에서 먼 이국적인 것을 찾는다. 육명심은 반대였다. 일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바운더리 안에서, 그러나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비관행적인 앵글로 서울을 다시 본다. 흔들려도 좋다,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 — 도시의 파편적 느낌, 도시만의 리듬을 잡아내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그 결과 1960~70년대 한국 사진계 주류의 두 갈래 — 정부·서울시가 만든 “질서정연한 새 서울” 사진과, 골목 안 빈민·노동자의 휴머니즘 넘치는 사진 —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도시 자체의 또 다른 얼굴이 등장한다.

김 교수가 사례로 든 사진들은 인상적이다. 배재학당 설립자 아펜젤러의 동상이 수리 천에 감긴 채 한 손만 묘하게 위로 치켜 들고 있는 모습. “크고자 하면 남을 섬기라”는 아펜젤러의 교훈과 역설적으로 어긋나는 그 손의 각도. 지게에 짐 대신 마네킹을 묶어 짊어진 아저씨 — 짐을 지는 건지 사람을 지는 건지 모를 그 프레임. 비 오는 날 웅덩이에 비친 도시의 역상. 지면에 새겨진 “이리 가시오 저리 가시오”의 화살표들. 명동의 풍경을 찍을 때 사람이 아닌 떨어진 신문지에 집중하는 시선. 동대문운동장에서 마치 원숭이처럼 나무를 타는 학생들의 실루엣.

어떤 사람들은 앞만 보지만, 누군가는 더러는 눈이 뒤통수에 닿는 것처럼 뒤에 배경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다.

육명심, 김계원 인용

김 교수는 이 어법 — 공간을 비워 두는 구성, 회화적 구성에서 한 번 더 떠난 상징적 앵글 — 이 이후 〈예술가의 초상〉, 〈백민〉으로 이어지는 평생 화법의 출발점이라고 짚는다. 동상·마네킹·웅덩이·버려진 종이·묶인 동물·그림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사람은 종종 작게 잘려나간다. 박정희 정권의 직선적 도시 개발 논리가 만들어내던 “도시는 선이다”의 시대에, 그 직선의 뒤편으로 흘러내리던 우연·파편·임시적 사건과 사물을 카메라가 건져 올린 셈이다.

동시대성 같은 시기 일본에서는 다이도 모리야마·나카히라 타쿠마 등이 모인 프로보크(プロヴォーク) 그룹이 “영상(映像)”이라는 용어를 직접 선언문에 썼다. 고도 성장기 일본의 현실을 언어가 포착하지 못한다는 인식, 흔들리고 입자 거친 사진으로 그 부유하는 현실을 잡겠다는 시도였다. 김 교수는 “영향 관계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다. 한국도 일본도 변화의 한복판에 있었고, 비슷한 시기 비슷한 자각이 일어났을 뿐이다. 1978년 자신의 사진사 서술에서 육명심은 본인의 작업과 당대 신진 작가들의 작업을 한데 묶어 영상 사진 세대로 명명한다.
Part III

예술가의 초상 — 두 가지 콤플렉스를 넘다

1967년, 사진 입문 1년 만에 박두진은 시집 《하얀 날개》에 들어갈 프로필 사진을 제자에게 맡긴다. 표지의 장정은 변종하 화백이 맡았다. 옛 책의 관습대로 표지에는 보통 화가의 스케치나 증명사진이 들어가야 했지만, 그는 사진을 청한다.

스승의 프로필을 찍어 보낸 사진에서, 1년 차 신참 사진가는 전형적인 프로필 사진의 문법 — 부르주아 초상의 단정함 — 을 거부한다. 턱을 치켜들고 목을 잘라 로우앵글로 잡은 그 사진은 박두진 특유의 청록파다운 고집과 성깔까지 담아냈다. 박두진은 흡족했고, 문인들 사이에 소문이 퍼졌다.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1973년부터 본격화된 예술가의 초상 연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이 작업은 작가 본인의 두 가지 콤플렉스를 정면돌파한 시도였다.

육명심 〈예술가의 초상〉 연작 — 시인 서정주
〈예술가의 초상〉 연작 중 시인 서정주 국립현대미술관 / 한국일보 보도
하나영문학·연극으로 시작한 자기가 문학으로 승부를 보지 못하고 사진으로 왔다는 데서 오는 콤플렉스. 문인 앞에서 감히 마주 보지 못한 자기 자신.
“셔터만 누르면 나오는 기계 예술”로 사진을 무시하던 시대, 미술·문학에 비해 열등한 위치라는 외부의 시선에서 오는 콤플렉스.

예술가의 초상은 피사체와 동등하거나 오히려 카메라가 약간 위에 서는 시선을 전제한다. 평소 감히 넘보지 못한 서정주·박두진·고은·선우휘를, 이번에는 “나의 피사체”로 마주 세운다. “정면 승부할 수 있었다.” 김 교수는 이를 두고 “정신과 상담을 받고 속이 시원해졌다”는 작가의 표현을 옮긴다.

사람 냄새, 그러나 번뜩이는 눈빛

이 작업은 1960~70년대 도시 중산층의 교양 형성과도 맞물려 있다. 작가의 얼굴, 작가 아틀리에의 풍경, 작가와의 대담 — 이런 콘텐츠가 도시 중산층의 새 교양으로 자리 잡던 시점이었다. 동양화가 천경자가 자신의 그림 속 강아지와, 무섭기로 유명한 화가 유영국이 자신이 키우던 작은 강아지 앞에서 사죽을 못 쓰는 장면 등 — 이런 인물상들이 대중 매체를 통해 유통되기 시작한다.

같은 시기 임응식·문선호 같은 사진가들이 백인선집(美術家 百人選集) 등 출판 의뢰를 받아 작가의 얼굴을 기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용역”이었다면, 육명심에게는 작업이었다. 김 교수가 비교해 보인 두 장의 박서보 초상은 인상적이다. 문선호의 사진 속 박서보는 “사람 좋은 아저씨”다. 그러나 육명심의 박서보는 묘법(描法) 연작이 막 시작되어 박서보가 한국 미술 전위의 정점으로 치고 올라가던 시기, 런닝에 반바지를 입고도 카메라를 똑바로 노려보는 평범하면서 성깔 있는 인물이다.

밥 먹고 잠자고 똥 싸고를 반복하는 사람 — 사람 냄새가 나지만 그 안에 뭔가 번뜩이는 눈빛.

육명심이 강조한 초상의 원칙

서정주는 사진을 무시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 “사진이 무슨 예술이냐, 딸깍 하는 게 예술이냐.” 그러나 박두진의 사진을 본 뒤 그는 “빨리 와서 나도 한 장 찍어 봐라”고 청했고, 자기 사진을 옛 방식대로 표구해서 집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김 교수는 그 서정주 초상에서도 영상 사진기에 익힌 공간 비우기의 어법이 그대로 작동하고 있음을 짚는다. 거장의 권위로 가득 채우는 대신, 한 호흡 비우고 인물을 세우는 방식이다.

Part IV

백민 — 지배선 뒤편의 얼굴

1979년 무렵, 잠실 신천에 살며 성남의 신구전문대학으로 출퇴근하던 시기 — 잠실에서 성남으로 향하는 길이 허허벌판에서 아파트로 변해가던 시점이다. 김 교수는 “인공위성처럼 모든 것을 보여 주는 시선이 없다”며, 그 시기 항공 이미지를 찾아본 결과 “이런 풍경 변화를 보면서 작가는 위기 의식을 느꼈을 것”이라 추측한다. 작가 본인의 인터뷰도 그 위기감을 그대로 증언한다.

그러나 그는 풍경을 찍지 않았다. 풍경이 아니라, 변하는 풍경 아래의 기층민(基層民)을 찍는 쪽으로 향한다. 이것이 백민(白民) 연작이다.

백민(白民)이란 아무런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 평민, 혹은 서민. 그러나 서민도 아니고 민중도 아닌 — 토박이.

육명심의 정의

왜 민중이 아닌가. 민중미술·민중문학에서 이미 이데올로기적으로 담론화된 대상이 민중이라면, 그가 찍고 싶었던 것은 그것보다 훨씬 안쪽에 있는 주체였다. 피억압자로 대상화된 주체가 아니라, 옛날부터 민속놀이와 인형극·가면극 속에 있었고, 19세기 말 서양 문물이 들어오던 시기에도 마을 한가운데 아침저녁으로 보이던 그런 얼굴들. 이름 없는 촌로, 늙은 소거간꾼, 무당, 소리꾼, 무형문화재 보유자, 승려.

강릉, 1983

김 교수가 자신의 논문을 시작하는 사진은 1983년 강릉의 무당 초상이다. “한국 사진사의 길이 남을 명작 중 하나”라고 그는 단언한다.

육명심 〈백민〉 연작 — 강원도 강릉, 1983
〈백민〉 연작 중 강원도 강릉, 1983 뮤지엄한미 소장 / 경향신문 보도

무당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못 찍는, 한 인물의 영적 교감 같은 어떤 순간 — 프레임을 과감히 잘라 인물의 얼굴로 곧장 압박해 들어간 그 사진은, 염주의 결, 눈동자, 굳게 다문 얼굴 주름 하나하나까지 잡아낸다. 김 교수의 표현으로는, “사진을 정말 이렇게 찍으면 피사체의 수명이 1년씩 줄어든다는 미신이 믿어질 정도로” 인물의 에센스가 결정화되어 있다.

백민 연작에는 인물뿐 아니라 토속 신상과 초상화도 함께 들어간다. 자신이 찍은 백민의 얼굴과 그 신상의 얼굴이 어떻게 유사한가를 작가는 보여 주려 했다. 이 흐름은 자연스럽게 다음 작업으로 이어진다.

장승 — 백민이 만든 자신의 얼굴

1985년, 52세의 작가는 〈장승〉 연작을 시작한다. 김 교수는 이를 “백민이 만든 자기의 얼굴”이라 부른다. 얼굴성이 인물에서 사물로 이전되는 순간, 그 사물 고유의 질감과 물성이 카메라의 기계적 시선을 통해 예리하게 다시 잡힌다.

실상사의 유명한 장승을 두고 그는 비교를 한 가지 든다.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도판 속 실상사는 토판본 도판이지만, 육명심의 프레임에 담긴 실상사는 도판화될 수 없는 실존 그 자체의 생명력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육명심 〈장승〉 연작
〈장승〉 연작 — 백민이 깎아 세운 자신의 얼굴 웅진출판사 사진집 수록
시대 맥락 같은 시기 박정희 정권의 “전통 만들기” 프로젝트는 위대한 인물·왕릉·문화유산의 서사 쪽으로만 향했다. 국립박물관 수학여행, 황금 유물의 전시화. 육명심은 그 위대함의 도판에 끼지 못한, 그러나 마을 어딘가에 여전히 살아 있는 토속에서 한국 문화의 원형과 민족 특유의 미감을 찾았다. 그것은 옛것에 대한 향수가 아니라, 집단 무의식의 잔류물에 대한 발굴에 가까웠다.
Plates

참고 도판 — 우리 것 3부작

강연 본문이 짚어 가는 작업의 시각적 맥락을 보강하기 위해, 공개된 보도 자료와 사진집 도판 중 일부를 참고로 함께 싣는다. 모든 이미지의 저작권은 작가 유족과 해당 미술관·출판사에 있으며, 본 아티클에는 비상업적 인용 목적으로 가져왔다.

Coda

왜 지금, 다시 육명심인가

강연 말미에서 김 교수는 묻는다. 지금에 와서 왜 이 사람이 중요한가. 왜 좋은 사진가인가.

그의 대답은 두 겹이다. 첫째, 육명심의 작업은 1960~70년대 한국 사회가 가장 급변하던 시점의 시각 문화를 읽을 수 있게 해 주는 좋은 사진가다. 그러나 그것은 그 시각 문화의 지배선이 아니라, 지배선이 늘 가려 왔던 것 — 그 틈새에서 잘 보이지 않던 파편을 카메라라는 새로운 시선 매체로 건져 올렸다는 데 의미가 있다.

둘째, 두 가지는 늘 함께 간다. 단순히 근대화·도시화의 시각 문화를 보여 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카메라라는 매체의 무한한 잠재성과 가능성을 통해 보여 주었다는 점. 그것을 한국적 모더니즘 사진으로 읽든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로 읽든 그것은 분류의 문제일 뿐, 한 시대의 흐름을 독자적인 고유의 언어로 보여 준 사진가는 매우 드물다.

1994년 — 그의 첫 개인전이 열린 해다. 사진가로 입문한 지 거의 30년. 김 교수가 짚듯이, 같은 시기 배병우조차 “전시를 시켜 주는 공간이 없었다”고 회고할 만큼 사진은 미술 제도 밖에 머물러 있었다. 육명심의 늦은 첫 개인전은 한 작가의 늦음이 아니라, 한국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의 늦음이다. 그러나 그 30년의 시간 동안 그가 쌓아 올린 작업은 — 강연 도입에서 김 교수가 말했듯 — 작가가 떠난 지금에도 “영원히 빛이 나게 박혀” 메시지를 계속 보낸다.

한 시대의 흐름을 이렇게 오롯하게, 독자적으로, 고유의 언어로 보여 준 사진가는 굉장히 드물다.

김계원의 결론
04 / Glossary

핵심 용어

용어 설명
백민白民 / Baekmin “아무런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 평민, 혹은 서민.” 육명심이 1979년부터 약 5년간 집중적으로 작업한 대표 연작의 제목. 서민도 민중도 아닌 자리 — 민중미술·민중문학에서 담론화되기 이전, 마을 한가운데 늘 있던 토박이의 얼굴을 의미한다. 이름 없는 촌로, 늙은 소거간꾼, 무당, 소리꾼, 무형문화재 보유자, 승려 등이 피사체가 되었다.
영상 사진映像 / Yeongsang Sajin 1960년대 말 ~ 1970년대 초반의 신진 사진가들이 보여 준 새 경향. 작가의 주관적 감각·고유의 시선, 도시의 파편성, 비관행적 프레이밍, 강한 컨트라스트가 특징. 일본 프로보크 그룹이 동시기 같은 용어를 썼지만, 김계원은 영향 관계가 아니라 동시대성의 산물로 본다. 육명심은 1978년 자신의 사진사 서술에서 이 명칭을 채택해 자신의 작업과 동료·제자들의 작업을 한 흐름으로 묶었다.
예술가의 초상Portraits of Artists 1967년 박두진 시집 프로필 사진을 출발점으로, 1973년부터 본격화된 연작. 시인·소설가·화가·조각가·서예가·무형문화재 보유자까지 포괄. 부르주아 초상 문법을 거부하고 “사람 냄새가 나지만 그 안에 번뜩이는 눈빛”이라는 원칙으로 작업.
우리 것 3부작The Korean Trilogy 《백민(1979~)》, 《검은 모살뜸(1983~)》, 《장승(1985~)》의 세 연작. 도시화·산업화 속에 사라져 가는 토박이의 얼굴·풍습·신상을 흑백 사진으로 남긴 작가의 후기 대표작.
제3의 눈The Third Eye 육명심이 카메라에 부여한 별칭. “카메라 아이가 제3의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사진가의 두 눈(주관)이 보지 못하는 시선을 카메라의 기계적 시선이 열어 준다는 의미. 라슬로 모홀리-너지의 뉴비전 계열에서 받은 영향이다.
공간 비우기Negative Space 김계원이 육명심 작품의 핵심 어법으로 짚는 구성 원리. 인물 뒤편의 배경을 비워 두는 것 — 회화적 구성에서 한 번 더 떠난, 상징적 앵글. 영상 사진기에 익힌 이 어법이 〈예술가의 초상〉, 〈백민〉으로 일관되게 이어진다.
청록파Cheongnokpa 1939~1940년 《문장》을 통해 등단한 박두진·박목월·조지훈 세 시인이 1946년 합동 시집 《청록집》을 펴내며 형성된 한국 현대시의 한 줄기. 육명심에게 박두진은 연세대 영문과 시절 스승이자 사진의 길로 그를 끌어들인 결정적 인물이었다.
모구회母丘會 전후 한국 구상파 화가들이 결성한 미술 단체. 도상봉·이종무·손응성 등 국전(國展) 실세들이 모여 있었다. 육명심의 장인이 된 화가 이동훈도 이 그룹의 일원이었으며, 이 결혼이 작가의 사진 입문 계기가 된다.
프로보크プロヴォーク / Provoke 1968년 일본에서 다이도 모리야마·나카히라 타쿠마 등이 결성한 사진 동인지. 단 3호로 종간했으나, 흔들리고 거친 입자의 “아레·부레·보케(거칠고·흔들리고·흐릿한)” 미학으로 일본 사진의 흐름을 바꿨다. 선언문에서 “영상”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했다.
백민선집百人選集 강연 본문의 “백인선집”. 1970~80년대에 미술가 100인의 얼굴과 작업을 기록한 출판 프로젝트. 사진가 문선호가 기획·편집·촬영을 주도했다. 같은 시기 육명심의 〈예술가의 초상〉이 “용역”이 아닌 “작업”으로서 다른 길을 갔다는 비교 지점이 된다.
05 / Verification

팩트 체크

검증 01 · 생몰 연도
강연 속 진술

“32년에 대전 출생이시고… (강연자가 작년 별세 소식을 들었다고 언급)”

교차 확인

위키백과 및 한국일보·경향신문의 부고 기사에 따르면 육명심의 공식 생몰 기록은 1933년 9월 10일 ~ 2025년 10월 15일로, 강연자의 “1932년 출생” 언급과 1년 차이가 있다. 부고 시점은 강연(2026년 5월)으로부터 약 7개월 전이다. 한국 작가들의 경우 호적상 등록 연도와 실제 출생 연도가 다른 경우가 빈번해 이 정도 차이는 흔히 발생한다.

검증 02 · 사진 입문 시점
강연 속 진술

강연자는 작가가 1965년경(32세 결혼 직후) 사진에 입문했다고 묘사한다.

교차 확인

뮤지엄한미의 전시 자료에서도 “홍순태·한정식 두 작가보다 조금 늦은 1965년에 사진을 시작한 육명심”이라고 명시하고 있어 강연 내용과 일치한다. 1969년 “인상” 시리즈를 시작했다는 박물관 측 기록과 강연자의 1967년 인상 시리즈 시점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출품 시점(1967)과 시리즈 본격화 시점(1969)의 구분으로 보인다.

검증 03 ·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
강연 속 진술

전시 제목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은 “굉장히 시적”이며 “누구의 선택인지 모른다”고 강연자가 언급.

출처

이 구절은 시인 정현종(1939년 서울 출생, 연세대 철학과)의 동명 시 마지막 행에서 가져왔다.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정현종 또한 연세대 출신이며 한국 현대시의 대표 시인. 전시 기획자가 작고한 네 작가의 “모든 순간”을 시의 구절로 환기한 셈이다.

검증 04 · 모구회의 위상
강연 속 진술

“모구회라는 것은 사진 하시는 분들은 조금 생소하실 수도 있는데 미술에서는 너무너무 중요한 그 전후에 구상파 화가들이 결성한 그룹이고요. 여기에 도상봉, 이종무, 손응성 같은 국전의 실세들이 모여 있었다.”

교차 확인

한국 미술사 자료에 따르면 모구회(母丘會)는 1957년 도상봉·이종무·손응성·박상옥·이의주 등 구상 계열 화가들이 결성한 단체로,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 심사위원을 다수 배출하며 1960~70년대 한국 구상화단의 보수적 주류를 형성했다. 강연자의 묘사는 미술사 일반 기술과 부합한다. 작가의 장인이 된 이동훈(1903~1984) 또한 충청 지역을 대표하는 사실주의 풍경 화가로, 모구회 일원으로 활동했다.

검증 05 · 첫 개인전 시점
강연 속 진술

“1994년에 제1회 개인전 — 처음으로 개인전을 하시는 거예요. 사진이라는 매체 자체가 미술 분야에 비해 얼마나 뒤떨어진, 제도적으로… 사진이 미술 제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을 시점.”

맥락 보강

한국에서 사진의 미술관 진입은 1980년대 후반~90년대 초반에야 본격화되었다. 사진 전문 갤러리가 거의 없었고, 사진가의 개인전은 사진 동호회 살롱이나 백화점 문화공간에서 산발적으로 열렸을 뿐이다. 작가의 첫 개인전이 입문 약 30년 만에 열렸다는 사실은 개인의 늦음이 아니라 한국 사진 제도의 늦음으로 읽는 것이 정확하다.

06 / Reflections

이 강연이 건드린 곳들

Insight 01

“객관적으로 쓰자”의 대가

강연 도입의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학술적 자기반성이다. 김계원은 10여 년 전 작가가 생존해 있을 때 일부러 인터뷰를 따지 않고 객관적으로 작가론을 썼다고 말한다. 학술의 거리두기로서는 정당한 선택이지만, 작가의 갑작스러운 부고 앞에서 그는 그 거리두기가 “언젠가”의 가능성에 의지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이는 사진사 연구자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 살아 있는 1세대 한국 작가들에 대한 구술·인터뷰 아카이브가 지금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조용한 경고처럼 들린다.

Insight 02

“영향”이 아니라 “동시대성”

강연자가 일본 프로보크 그룹을 언급하며 “영양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못 박는 대목은 미묘하게 중요하다. 한국 사진사를 보는 종래의 시선은 일본 — 그것도 구미를 한 번 더 번역한 “중역 문화” — 을 매개로만 한국을 설명하는 경향이 있었다. 김계원은 1960년대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져온 자신감이 “중역 문화를 떠나 자생적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인식과 맞물려 있었다는 작가 본인의 회고를 인용한다. 이는 한국 사진의 동시대성을 일본의 그림자에서 끄집어내려는 시도로 읽힌다. 영향사가 아니라 평행사로서의 동아시아 사진사라는 관점이다.

Insight 03

“공간을 비운다”는 어법의 정치성

김계원이 일관되게 짚는 육명심의 화법 — 공간을 비워 두는 구성 — 은 단순한 미학적 특이성이 아니다. 1960~70년대 박정희 정권은 시각적 풍요로 빈자리를 메우는 시각 체제를 구축했다. 고층 빌딩, 위대한 인물, 발견된 왕릉 유물, 직선의 도시. 육명심의 카메라가 인물 뒤편을 비우고 거리에 잘려나간 사람과 그림자를 남길 때, 그것은 “비어 있어도 된다”는 작은 정치적 진술처럼 작동한다. 채움의 시대에 비움은 어법이 아니라 자세였다.

Insight 04

“토박이”라는 발명 — 민중과 서민 사이

1980년대 민중미술·민중문학이 한국의 기층민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호명할 때, 육명심은 1979년부터 시작한 〈백민〉 연작에서 의도적으로 다른 단어를 택한다. 백민이라는 어휘는 옛 한자 용례지만 작가의 손에서 사실상 재발명된 개념이다. 그것은 피억압자도 아니고 도시 중산층도 아니며, 산업화·도시화의 거센 물결 속에서도 자신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 있던 자리에 대한 명명이다. 김계원이 강연 말미에 인용한 박영숙의 1994년 평론 — “민중에 가까운 사람을 찍지만 민중 이데올로기에 갇히지 않는” — 은 이 거리두기를 정확히 짚고 있다. 동시대 민중미술이 강력한 정치적 동원력을 가졌다면, 육명심의 백민은 그 정치 너머의 인류학적 시간을 본 셈이다.

Insight 05

강연에 빠진 한 가지 — 이명희

강연은 육명심의 사진 입문 계기로서 부인 이명희를 언급하지만, 이내 화가 이동훈의 따님이라는 친정 쪽 맥락에 더 비중을 둔다. 그러나 강연의 정보를 다시 읽으면, 1965년 한국에서 30대 여성이 “이른 나이에 카메라를 만지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드문 사건이었다. 한국 사진사에서 1세대 여성 사진가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빈약하다. 이명희는 작가로 활동하지 않았으나, 그녀의 카메라가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백민〉도 〈예술가의 초상〉도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사진사의 “기원의 장면”에는 종종 이렇게 호명되지 않은 매개자가 서 있다.

Insight 06

1994년의 의미 — 한국 사진 제도의 늦음

입문 약 30년 만에 열린 첫 개인전. 강연자는 이를 작가 개인의 늦음이 아니라 매체 자체의 늦음으로 읽으라고 말한다. 흥미로운 것은 1994년이라는 시점이다. 같은 해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국정 과제로 내걸었고, 미술 시장은 외환위기 직전의 마지막 호황기에 진입하고 있었다. 사진이 마침내 “미술 제도” 안으로 들어가던 그 길목에서, 육명심이 보여 준 첫 개인전이 던진 질문은 단순하다 — 너희가 이제 받아들이려는 사진은, 우리가 30년간 찍어 온 사진과 같은 사진인가? 김계원이 강연 막바지에 “한국적 모더니즘 사진으로 읽든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로 읽든 상관없다”고 말한 것은, 어쩌면 그 질문에 대한 유일하게 정직한 답이다.

Image Credits & Notes 본 아티클에 수록된 작품 이미지는 다음 매체의 공개 보도 자료에서 비상업적 인용 목적으로 가져왔습니다 — 경향신문 「눈빛 하나에 멈췄다」 (2026.04.23), 한국일보 부고 보도 (2025.10.15), 월간사진 / 디자인정글 「백민 출판으로 우리것 3부작 마친 육명심」 (2011.08). 작품의 저작권은 작가 유족 및 뮤지엄한미·한미사진미술관·열화당·웅진출판사 등 해당 기관에 있습니다. 이미지가 원본 서버의 보안 정책으로 보이지 않을 경우, 위 링크의 원문 기사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