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열의 시작: "모든 합법적 용도"라는 조항
2026년 2월, 앤트로픽과 미국 국방부 사이의 계약 갱신 협상은 단 하나의 문구에서 막혔다. 국방부가 요구한 조항은 Claude를 "모든 합법적 용도(any lawful use)"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앤트로픽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이 표현이 무해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두 가지 위험한 가능성을 열어놓는다고 주장했다.
첫째는 대량 국내 감시 문제다. 미국 법상 정부는 민간 데이터 브로커에게서 국민들의 GPS 이동 경로, 구매 내역, 소셜 미디어 기록 등을 합법적으로 구매할 수 있다. AI가 이 방대한 데이터를 결합해 개별 시민의 충성도·행동 패턴을 추적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불법'이 아닐 수 있다. 둘째는 완전 자율 무기 문제다. 현재 바이든 행정부 시절 수립된 '인간이 치명적 결정에 개입해야 한다'는 정책은 헤그세스 장관이 언제든 일방적으로 바꿀 수 있다.
협상 막바지에 국방부는 흥미로운 제안을 했다. 앤트로픽의 현재 조항을 그대로 수용하되, 딱 한 구절 — "대규모 취득 데이터(bulk acquired data) 분석"을 금지하는 조항 — 만 삭제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이 하나의 문장이 앤트로픽이 지키고자 했던 핵심이었고, 협상은 결렬됐다.
OpenAI의 움직임: 구원자인가, 기회주의자인가
앤트로픽의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OpenAI는 별도의 채널로 국방부와 동시에 협상을 진행하고 있었다. 앤트로픽은 이 사실을 알지 못했다. 협상 결렬이 발표되던 당일, OpenAI는 곧바로 계약 체결을 공개했다.
더 아이러닉한 것은 알트만의 태도였다. 그는 공개적으로 "우리도 앤트로픽과 같은 레드라인을 공유한다"고 밝히며 지지를 표명했다. 그러나 직후 체결한 OpenAI의 계약서를 들여다보면 논란이 된다. OpenAI의 조항은 "모든 합법적 목적(all lawful purposes)"을 허용하면서, 국방부가 "대량 국내 감시는 불법이므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 스스로 확인하는 형태를 취했다. 앤트로픽은 이것이 법적 강제력 없는 선언에 불과하다고 봤다.
뒤늦게 공개된 알트만의 사내 슬랙 메시지는 이 상황의 복잡성을 드러냈다. 그는 직원들에게 "앤트로픽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지만, 동시에 "아모데이가 수년 동안 OpenAI를 무너뜨리려 했던 경쟁자"라는 불만도 털어놨다. 결국 먼지가 가라앉을 때, OpenAI는 계약을 따냈지만 여론전에서는 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프리즘
이 충돌은 단순한 계약 분쟁이 아닌, 정치적 색채가 짙은 권력 투쟁이기도 하다. 아모데이는 내부 메모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앤트로픽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독재자식 찬사(dictator-style praise)"를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언급했다. 트럼프 AI 차르 데이비드 색스는 이미 2025년 10월 앤트로픽을 "좌파 AI"로 지목했고, 헤그세스는 앤트로픽의 거절을 "오만과 배신"이라 표현했다.
한편 한 행정부 관리는 Axios에 이렇게 말했다. "결국 이것은 우리 전사들이 싸워 이길 수 있는 최고의 도구를 갖추는 문제다. 기밀 환경에서 Claude가 다리오의 의제를 비밀리에 수행하지 않는다고 신뢰할 수 없다." 앤트로픽의 안전 기준이 단순한 기업 정책 문제가 아닌 국가 안보 위협으로 프레이밍된 것이다.
더 넓은 전선: AI 기업들의 딜레마
이 분쟁이 촉발한 파문은 앤트로픽 너머로 번졌다. 구글, xAI, OpenAI 등 다른 AI 기업들도 국방부와 기밀 시스템 접근 협상을 병행하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내부적으로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Axios 보도에 따르면, OpenAI와 구글 고위 임원들도 앤트로픽의 레드라인과 유사한 우려를 갖고 있었지만 이를 공개적으로 주장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공개적 반응도 극적이었다. 구글과 OpenAI 소속 직원 약 40명이 앤트로픽의 소송에 지지 의견서(amicus brief)를 제출했다. 여기에는 구글의 수석 과학자(Chief Scientist)도 포함됐다. 가톨릭 신학자,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기술 노동자 단체들도 앤트로픽 편에 섰다. 사건은 이미 단순한 AI 계약 문제를 넘어, 미국 민주주의와 감시 사회에 대한 근본적 논쟁이 됐다.
아이러니: 안전을 위해 위험한 계약을 해야 하는가
앤트로픽의 입장에는 핵심적인 모순이 내재돼 있다. 아모데이는 오래전부터 "안전을 중시하는 기업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기술의 핵심에 있는 것이 더 낫다"는 논리를 내세워 왔다. 이것은 핵 확산에 반대하면서 책임 있는 국가만이 핵을 보유해야 한다는 논리와 구조적으로 비슷하다.
그러나 이 논리는 앤트로픽이 자사의 안전 약속을 일부 완화할 때 빈틈이 생긴다. 앤트로픽은 2025년 책임감 있는 스케일링 정책(Responsible Scaling Policy)을 개정해, 새 모델을 안전하게 만드는 방법을 모르더라도 일방적으로 개발을 중단하지 않겠다고 바꿨다. 그 안전 기준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우리가 운전석에 앉아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도 함께 흔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