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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 요약 노트

어떻게 살아가는가
공존하는가

청년과 노년이 함께 만드는 브랜드, 시니어마켓 이야기
2023.04.21·심현보·아이앤윌리(I&WILLY) 대표

01

할머니의 폐지 — 모든 것이 시작된 곳

26세에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된 계기는 친할머니 집 앞 풍경이었다. 할머니가 폐지를 줍고 계셨다. 4남매의 자녀가 가까이 살고, 매주 만나며 용돈도 드리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폐지를 주웠다. 이유는 단순했다. "내가 번 돈으로 친구들한테 아이스크림 한 번 사주고 싶어서." 소일거리이자 자기만의 용돈이 필요했던 것이다.

가족은 만류했고, 할머니는 폐지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할머니의 친구분은 폐지 없이는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처지였다. 이 장면이 심현보 대표를 고물상 앞으로 이끌었다.

02

새벽 6시의 고물상 — 두 번의 충격

새벽 6시 반, 고물상 앞에 섰다. 두 가지 충격이 있었다.

🚗

첫 번째 충격 — 세단을 타는 사장님

6시 55분, 검은 세단 한 대가 도착했다. 운전석에서 내린 멋진 아저씨가 고물상 문을 열었다. 폐지를 모아 오는 어르신들과 그 폐지를 사들이는 사장님 사이의 간극이 눈에 들어왔다.

🤝

두 번째 충격 — "고맙다"를 듣지 못하다

2시간 반 동안 40~50명의 어르신들에게 물, 장갑, 간식 꾸러미를 나눠드렸다. 그런데 "고맙다"는 말을 10번도 듣지 못했다. 고물상 사장님이 말했다. "사회복지사인 줄 알았을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한 거지." 그 순간 본질적인 질문이 떠올랐다. 아무리 좋은 직장에서 돈을 벌어 기부하고 후원한들, 이들의 삶이 정말 바뀔까?

03

폐지 1kg = 60원 — 사라지는 생계

한국에 폐지를 주워 생계를 꾸리는 어르신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한 공식 통계는 없다. 추산은 6만 6천 명에서 175만 명까지 편차가 크다. 2016~17년 서울 동작구 연구에서는 폐지 수거 어르신의 약 75%가 생활비 마련이 목적이라고 답했다.

150원 2016~17년
폐지 1kg 가격
60원 현재
폐지 1kg 가격
~9만원 현재 기준
추정 월수입

리어카 한 대를 채우려면 3일이 걸리고, 100~150kg 정도가 실린다. 2016년 기준으로 한 달 약 22만 5천 원, 현재 가격으로는 한 달 약 9만 원. 여기에 노령연금을 더해도 살아가기 어렵다. 폐지 수거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확신이 생겼다.

04

나를 세우고 우리를 세우다 — 아이앤윌리

어르신들을 만나며 발견한 공통점은 자존감이 매우 낮다는 것, 그리고 다수가 독거 상태라는 것이었다. 공동체를 만들어 심리적 안정감을 줄 수 있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을까. '아이앤윌리(I&WILLY)'라는 이름은 '나(我)를 세우고(立) 우리를 세우다'라는 뜻이다. 개인이 먼저 서야 공동체가 선다.

어르신들을 모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야기만으로는 오래 갈 수 없었다. 공감대를 만들 무언가가 필요했고, 그것이 그림이었다. 60~70년 만에 펜을 잡은 어르신들의 그림은 놀랍도록 유니크했다. 이 그림들을 콘텐츠와 제품으로 만들고, 소비자와 연결하는 브랜드 '시니어마켓'이 탄생했다.

🎨 어르신이 그림·글씨 창작 💰 저작권료 지급 (1차 일자리) 📦 제품화·콜라보 🤲 포장 인건비 (2차 일자리)
05

할머니 상담소 — 세대 간 벽을 허물다

그림만으로는 아쉬웠다. 청년과 노년을 진짜로 이어줄 콘텐츠가 필요했고, 그것이 상담이었다. 어르신들에게 직접 결혼, 진로, 돈, 외로움에 대한 질문을 보내고, 어르신들이 자신만의 언어로 답한다. 세대 간 벽은 두꺼웠다. 어르신들은 "젊은 사람 필적 조사해서 찾아와 때릴 거야"라고 걱정할 정도로 청년을 무서워했고, 청년들은 지하철에서의 일부 경험을 전체로 일반화하곤 했다.

💬 사는 게 너무 재미없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없어요."

— 한복순 어르신, 90세

💬 제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이 맞는지 모르겠어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딘지 알아야 내가 알려주지."

— 어르신 답변

💬 혼자 있는 게 좋고 편한데 결혼을 꼭 해야 할까요?

"편이 맞냐, 그럼 안 해도 된다. 근데 외로워. 니 마음대로 해."

— 어르신 A

💬 씀씀이가 커서 모아둔 돈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씀씀이가 헤프면 배가 고파 봐야 한다."

— 어르신 답변

이 상담들은 책으로 엮여 출판되었고, 출판기념회도 열렸다. 어르신들은 평생 처음으로 사인을 만들고, 연습해 오셨다.

06

수정할 수 없습니다 — 브랜드의 두 가지 경쟁력

경쟁력 1

🎨 유니크함

78세 어르신이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 절기를 주제로 한 달력, 어르신의 손글씨 키링. 어디서도 찾을 수 없고 따라 할 수 없다.

경쟁력 2

✏️ 수정 불가

콜라보 브랜드에게 가장 먼저 하는 말: "우리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오탈자, 맞춤법 오류 그대로. 필요하면 새로 그리지만 결과는 전혀 다를 수 있다. 이것이 삶을 존중하는 방식이다.

소비자가 "맞춤법 검사도 안 하느냐"고 지적하면, 대표가 직접 답한다. "맞춤법이 틀린 게 아니라 그대로인 거예요. 이게 그분들의 삶을 존중하는 방식입니다." SK텔링크, 스킨푸드(일주일 만에 완판), 카카오, 배달의민족, 롯데백화점, 한국후지필름 등 다수 브랜드와의 콜라보가 이어졌다.

07

이름을 불러드립니다 —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아이앤윌리에는 세 가지 조직 문화가 있다.

🍚

① 점심을 같이 먹는다

면접에서 묻는다. "밥을 같이 먹어도 괜찮아요?"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이 브랜드를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르신들이 아침마다 만들어주시는 만두, 떡볶이, 잡채, 전, 누룽지, 닭모래집 — 강연 첫 장면의 음식들은 바로 이 '식구'의 밥상이었다.

📛

② 이름을 부른다

누구누구 엄마, 남편 댁 — 평생 그렇게 불려온 어르신들에게, 이 공간에서만큼은 "화자 어르신", "마형 어르신", "복순 어르신"으로 본래의 이름을 부른다. 집단이 아닌 개인으로 바라보겠다는 약속이다.

🪪

③ 사원증을 드린다

16명의 어르신 모두에게 사원증을 발급한다. 어르신들은 이 사원증을 놀라울 만큼 소중히 여겼다. 어딘가에 소속된다는 것 — 그것이 사원증 한 장에 담긴 의미였다.

08

복지의 대상이 아니라 생산자이자 창작자

심현보 대표의 핵심 메시지는 하나다. 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기부와 후원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전환해야 한다. 일할 수 있는 노인에게는 생산자와 창작자로서의 기회를 드려야 한다. 그것이 이 강연이 말하는 '공존'이다.

아이앤윌리의 다음 5년은 더 많은 지역의 어르신들에게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내부적 동기는 단순하고 강력하다. "5년 뒤면 우리 아버지가 65세다. 우리 엄마 아빠가 일할 수 있는 회사를 만들자. 거기서 같이 다니면 얼마나 좋을까."

청년과 노년, 어디서나 언제나
같은 시간 그리고 오늘을 각자가 사랑한다

— 아이앤윌리 내부 슬로건

Claude's Insight

사원증 한 장의 무게

앞의 두 강연이 한국 사회의 나이듦과 죽음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진단했다면, 이 강연은 그 문제를 한 사람의 행동으로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론에서 실천으로의 전환이다. 그리고 그 실천의 출발점이 거대한 정책이나 예산이 아니라, 고물상 앞 새벽 6시 반의 풍경이라는 것이 인상적이다.

이 강연에서 가장 강렬한 지점은 "수정할 수 없습니다"라는 한마디다. 맞춤법 오류를 고치지 않는 것, 그림을 다듬지 않는 것 — 이것은 단순한 마케팅 전략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람의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한다는 선언이다. 우리 사회는 노인을 '돌봄의 대상', '관리의 객체'로 바라보는 데 익숙하다. 송병기 작가의 강연에서 요양원의 할머니가 딸기를 먹지 못한 것도, 결국 어르신을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바라보는 시스템의 결과였다. 시니어마켓은 정반대의 선언을 한다. 어르신은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창작의 주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소속감의 힘이다. 사원증 한 장에 어르신들이 그토록 강하게 반응한 것은, "어딘가에 속해 있다"는 감각이 인간에게 얼마나 근본적인 욕구인지를 보여준다. 이것은 이도훈 교수가 지적한 1인 가구 증가, 세대 간 물리적 거리 확대라는 구조적 현실과 정확히 맞닿는다. 청년도, 노년도 각자 고립되어 가는 사회에서, 매주 수요일 아침 함께 모여 그림을 그리고 밥을 먹는 것 — 이 단순한 루틴이 만들어내는 공동체의 힘은 통계로는 잡히지 않지만 분명히 실재한다.

이 세 강연을 하나로 엮으면 이런 그림이 그려진다. 이도훈 교수가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진단했고, 송병기 작가가 '그래서 현장은 어떠한가'를 보여줬다면, 심현보 대표는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실행하고 있다. 구조 → 현장 → 실천. 그리고 세 강연 모두가 결국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우리는 나이든 사람을 어떤 눈으로 바라볼 것인가. 복지의 대상인가, 삶의 주체인가. 그 시선을 바꾸는 것이 아마도 모든 변화의 시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