핀란드에 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다
2008년, 21살의 장류진은 교환학생 지원서에 1위부터 30위까지 가고 싶은 도시를 적어냈다. 핀란드 쿠오피오 대학교는 27~28위쯤이었다. 위의 도시가 전부 떨어지고 거의 마지막에 배정됐다. 그런데 오히려 좋았다. 랜덤으로 부여받았기 때문에 더 좋은 느낌. 한 학기였지만 굉장히 소중한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서 둘도 없는 친구 예진을 만났다.
15년 뒤, 한 사람은 전업 소설가가 되었고, 한 사람은 직장인이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다시 핀란드로 떠났다. 9박 10일의 여행. 겉으로는 여행기지만, 15년의 삶을 왔다 갔다 하며 장류진의 문학관, 인생관, 행복관을 모두 담은 책이 됐다.
소설 쓰듯이 쓰자 — 가장 잘하는 걸 하자
장류진은 "하이퍼 리얼리즘 소설"을 쓴다고 알려져 있지만, 본인의 표현은 다르다. 리얼한 이야기를 쓰지만 그것이 곧 리얼은 아니다. 소설에서는 무대 위에 소품을 놓고, 배우를 세우고, 배경을 내리고, 한 바퀴 돌려본 뒤 무대에서 내려와 바라보는 방식으로 쓴다. 인물, 사건, 배경, 구성까지 전부 바꿀 수 있다.
에세이는 달랐다. 배경을 바꿀 수 없고(갑자기 필리핀에 갈 수 없으니까), 인물도, 인물의 성격도, 일어난 사건도 바꿀 수 없다. 그 제한이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냉장고를 부탁해처럼 제한이 있으니까 더 재미있는 면도 있었다.
너가 제일 잘하는 걸 하자, 해봐. 그래서 굉장히 잘 아는 배경과 굉장히 잘 아는 인물을 데리고 소설을 쓴다고 생각하고 썼다.
— 장류진글을 쓰려고 간 여행이 아니었기에 메모 하나, 노트북도, 노트도, 펜 하나 가져가지 않았다. 그런데 여행의 신이 연출해준 것처럼 마지막 순간에 맥주 축제를 발견하고, 오아시스의 Wonderwall이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고, 마지막 카페에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물었더니 — Relax and Enjoy.
에세이 앞에 소설을 놓은 이유
이 책의 첫 장은 에세이가 아니라 단편소설 「치유의 감자」다. 원래 마켓컬리의 마케팅용으로 쓴 글이었다. 감정 리스트에서 '치유'를, 식재료 리스트에서 '감자'를 골라 조합한 소설. 에세이로 써달라는 요청이었지만, 에세이를 쓴다는 두려움이 너무 커서 "소설로 하면 안 되겠냐"고 했다.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이 소설 너무 좋다, 책은 언제 나오냐"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에세이 앞에 이 소설을 프롤로그처럼 배치한 것은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장류진이라는 이름을 보고 소설을 기대하는 독자가 무리 없이 첫 장을 열어볼 수 있게. 그리고 15년 전 교환학생 시절, 다국적 친구들과 추운 나라에서 따뜻하게 어울렸던 그 정서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가보지도 않고 쓴 소설, 15년 뒤 친구가 완성시킨 장면
장류진의 첫 소설집에서 가장 사랑받는 작품 「탐페레 공항」은 핀란드 탐페레의 공항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그런데 작가는 탐페레에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교환학생 시절 예진이 먼저 핀란드를 떠나면서 탐페레를 거쳐갔고, 거기서 엽서를 보내왔다. 그 엽서가 전해준 따뜻한 이미지만으로 소설을 썼다. 정작 예진은 자기가 보낸 엽서 때문에 그 소설이 태어났다는 걸 몰랐다.
15년 뒤 여행에서 예진이 말했다. "탐페레에 꼭 가야 한다. 독자로서 가고 싶다." 짧은 일정에 억지로 하루를 합의해 기차를 타고 갔다. 15년 사이 저가항공 허브였던 탐페레 공항은 탄소 중립 정책으로 하루 두 편만 뜨는 거의 죽은 공항이 되어 있었다.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소설 속 세트장 같았다.
예진이는 읽지도 않은 「일의 기쁨과 슬픔」 책을 이 순간을 위해 가져왔다. 무겁잖아, 여행에. 읽지도 않을 걸. 그런데 이 순간을 위해서.
— 장류진, 탐페레 공항에서더 신기한 것이 있었다. 탐페레에 가본 적 없는 장류진은 구글맵 후기만 보고 썼는데 실제와 놀랍도록 비슷했다. 반면 15년 전 실제로 갔던 예진은 "내가 왔던 공항이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글을 읽으며 머릿속에 생긴 이미지가 원본을 덮어버린 것이다.
소설 속에 장류진은 얼마나 들어 있는가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이 있다. "이 소설에 작가님은 어느 정도 들어가 있어요?" 장류진의 답은 명쾌하다.
딸기 우유 안에 딸기만큼. 딸기 우유에는 딸기가 0% 들어 있지만, 어쨌든 그 우유의 정체성은 딸기 맛이 나고 딸기의 느낌이 나잖아요. 그 정도의 느낌으로 들어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 장류진그렇다면 이 에세이에는? "이 책은 생딸기 라떼. 딸기 자체는 아니지만, 제가 많이 들어 있는 생딸기." 에세이를 쓰면서 경제적 결핍, 가정적 상처 같은 개인사까지 솔직하게 썼다. 소설가로서 에세이를 쓰지 않으려 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소설은 '나'가 아니니까 욕해도 "내가 한 일을 욕한 거지, 나를 욕한 것이 아니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에세이는 나의 이야기이고 책으로 내면 고정된다.
장류진이 7년간 에세이를 쓰지 않았던 이유는 "나와 일을 분리하기 위해서"였다. 데뷔작 「일의 기쁨과 슬픔」의 대사 — "내가 짠 코드랑 나를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 는 인물에게 하는 말이자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뭘 해도 열심히 하는 사람
남편이 해준 말이 있다. "너는 뭘 해도 진짜 열심히 하는 사람이잖아." 기초반에서 뚝딱거리며 기본 동작을 배우는데, 선생님이 장류진의 모습을 보다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꽉 껴안았다. 못해도 지나치게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웠던 것이다. 그때 느꼈다 — 이게 자기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기질이라는 것을.
그래서 에세이를 쓰기로 했으면 완성도를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썼다. 개인적 상처, 드러내기 싫었던 결핍까지. 소설 쓰기를 배우던 시절, 소설가 선생님이 술자리에서 말했다. "난 진짜, 유진을 보면 — 왜 유진이 소설을 쓸까." 결핍이 없어 보여서. 나중에 다시 와서 "아까 그 말은 실수였다, 잊어라"고 했지만 잊을 수 없었다.
결핍이 없는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다. 누구나 다 조금씩 결핍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개인에게 굉장히 크게 다가올 수 있다. 나도 보이기보다는 결핍이 있는 사람이고, 그러니까 글을 쓰지 않겠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 장류진쓰고 나니까 시원했다. "진짜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구나. 내가 당면한 고민들을 글이라는 형태로 풀어내고 나니까 속이 너무 시원했다. 이게 쓰지 않고는 없는 글이었구나."
내 소설은 나의 부츠, 나의 기념품
후쿠오카의 오호리 공원에서 매일 산책하고 조깅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만약에 그렇다면 어떨까, 어떨까, 어떨까" 하며 조금씩 나아갔다. 이것이 장류진의 창작법이다.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이 영감의 원천이 된다. "나는 솔로"나 "환승연애"를 볼 때도 인풋을 넣어야지 하고 보는 게 아니라, 쉬고 놀려고 보는 건데 거기서 봤던 것들이 소설 쓸 때 다 활용된다.
남편이 10년 전에 한 이야기 — 투르 드 프랑스 경기에서 넘어진 자전거의 바퀴가 이상하게 계속 돌아가고 있었다는 일화 — 가 10년 동안 머릿속에 남아서 결국 소설이 됐다. "내가 쓴 소설들을 훑어볼 때마다 나의 20대와 30대를 떠올린다. 내 인생의 부츠, 내 인생의 기념품."
잘 쓰려고 하지도 말고, 누군가를 만족시키려고 애쓸 필요도 없고. 그냥 그런 마음이면 되지 않을까. 이건 내 사진도 나 자신도 아닌, 내 인생의 기념품일 뿐.
— 장류진, 「우리가 반짝이는 계절」 중니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이 아니다
15년 전 교환학생 시절, 물건을 플리마켓에서 다 팔고 빈 돗자리에 누워 낮잠을 잤다. 그때 생각했다 — "내 인생의 황금기가 끝나가고 있구나. 앞으로는 경쟁하고 빡빡한 삶이 이어질 거다." 왜 그렇게까지 비관적인 아이였는지.
15년 뒤, 그 도시를 다시 걸으며 과거의 자기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니 인생의 황금기는 지금이 아니다. 15년 뒤에 너는 정말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반짝이는 순간들을 품은 어른이 되어 있을 거다.
— 장류진, 15년 전의 자기에게요즘의 현실적 고민은 — 계속 쓸 수 있을까. 전업 작가라는 건 따로 있는 직업이 아니라 굉장히 운이 좋은 어떤 상태. 이 운이 언제까지 지속될까. "너무 좋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좋으면 최악을 생각해서 나를 좀 누르려는 성격." 그래도 단단히 가지고 가는 것이 있다.
내가 좀 나를 믿어주자. 내가 내 것을 좀 믿어주자. 나조차도 나를 믿지 못하는데 누가 나를 믿어주겠느냐. 내가 한 일의 결과물들이 이미 있고, 그것들이 나한테 힘을 준다.
— 장류진8년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비밀
장류진은 8년간 혼자 습작을 했다. 남편 딱 한 명만 알고 있었고, 누구에게도 소설 쓴다는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소설을 읽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왜인지 민망했다. 비밀이었다. 그래서 가장 원했던 것은 독자를 가지는 것.
직업의 세계에서 나를 찾아준다는 건 내가 뭔가를 줄 수 있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생활인으로서의 사적인 세계로 돌아오면, 내가 뭘 줄 수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내가 나여서 나를 좋아해주는 존재들이 있다. 오래된 친구들. 그리고 이제는 독자들도.
북토크 마지막, 한 독자가 말했다. "저는 작가 중에 따로 팬이 없는데, 유일하게 팬인 분이 장류진 작가님입니다. 하이퍼 리얼리즘이라는 느낌이 기존의 어떤 소설과도 너무 달라서. 비판이 있더라도 작가님만의 스타일이 너무 좋으니까 고수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