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연 요약 노트

노년에 대한
공상과 외면

노년 꿈꾸기를 저해하는 문화적 무의식
2023.04.21·정진웅·덕성여자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01

꿈이 없는 노년 — 유리천장으로서의 문화

여성이나 흑인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에 대한 인식은 이미 높아졌다. 하지만 노년의 가능성을 가로막는 유리천장에 대해서는 인식 자체가 거의 없다. 정진웅 교수는 이 보이지 않는 장벽을 '문화적 무의식'이라고 명명한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노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노년의 꿈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꿈이 없다는 건 뭔가 결핍된 거다.
노년에 희망과 꿈이 없으면 삶이 굳어지고 완고해진다.
꿈이 없으면 삶의 활기도, 반짝이는 눈빛도 없다.

— 프란치스코 교황, 넷플릭스 인터뷰 중

한국 사회에서 평균 50대 초중반에 퇴직한 뒤, 기대수명 90~100세까지 약 40년의 시간을 살아야 한다. 이 긴 시간을 아무런 꿈 없이 보내야 한다면, 그것은 실존적 재앙이다. 그런데 우리의 지배 문화가 제시하는 노년의 모습은 꿈이 아니라, 쇠퇴의 연쇄로 이루어진 내리막길뿐이다.

공자의 시대

평균 수명 ~40세

70세까지의 삶의 청사진을 제시
(이순 → 종심소욕불유구)

vs

현대 한국

기대 수명 90세+

삶의 청사진이
50세에서 멈춤

02

'노인'이라는 기표 — 나이 들고 보잘것없는 익명의 존재

'노인'이라는 단어의 용법을 분석해보면 흥미로운 사실이 드러난다. 나이가 많아도 국회의원, 재벌 회장, 은퇴한 대통령을 '노인'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이 단어는 근대적 성취에서 소외되어 공궁하게 사는 사람을 지칭할 때만 사용된다. '노인'이라는 기표에는 이미 '나이 들고 보잘것없는 익명의 존재'라는 뜻이 내장되어 있는 것이다.

노인 사장 어색함 성취한 사람에게 '노인'은 붙지 않는다
노인 국회의원 어색함 권력을 가진 사람은 '노인'이 아니다
노인 지식인 어색함 근대적 지식의 총아가 '노인'일 수 없다
노인 복지 자연스러움 주변적 존재에게 복지는 자연스럽다
노인 빈곤 자연스러움 소외된 존재에게 빈곤은 자연스럽다

'노인'이라는 기표의 부정적 힘은 주변 단어까지 오염시킨다. '독거노인'이 대표적이다. '독거'는 본래 '혼자 사는 것'이라는 중립적 의미일 뿐이다. '독거의 즐거움'이라는 책도 있다. 그러나 '노인'이 붙는 순간, 독거노인은 자동으로 '원치 않는 사정으로 소외되어 불쌍하게 혼자 사는 존재'가 된다. 타워팰리스에 혼자 사는 노인을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

'어르신'이라는 대안의 한계

'노인'의 부정성이 너무 심하다 보니 서울시는 2012년 '노인'을 대체할 말을 공모해 '어르신'을 공식 행정용어로 채택했다. 하지만 '어르신'도 완전한 해법은 아니다. 본인이 스스로를 호칭할 수 없는 말이다. "제가 어르신으로서 한마디 드리자면" — 이런 문장은 성립하지 않는다. 나를 항상 객체의 자리에 놓아두는 용어인 셈이다. 그런데도 '노인'보다는 낫다고 선택한 것 자체가, '노인'이라는 기표의 부정성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보여준다.

03

타자(他者)가 된 노년 — 열등한 존재로의 추방

'타자'란 언어 권력을 가진 주체가 자신의 부정적 속성을 떠넘기는 자리다. 자신을 이성적이고 문명적이고 윤리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싶을 때, 가장 쉬운 방법은 누군가를 비이성적이고 미개하고 윤리적으로 모자란 존재로 지정하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노년이 바로 그런 타자의 자리에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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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의 백일섭 — 방영된 것과 편집된 것

유럽 여행 중 무릎이 아픈 배우 백일섭은 부인이 싸준 장조림 큰 통을 꺼내 발로 차서 버린다. 이 장면은 편집 없이 방영되었고, SNS에서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 만약 같은 프로그램의 젊은 출연자 이서진이 같은 행동을 했다면? 편집되었을 것이고, 방영되었다면 방송 출연 정지를 받았을 것이다.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다는 사실 자체가, '노인은 그럴 수 있는 열등한 존재'라는 문화적 무의식이 얼마나 깊이 공유되어 있는지를 드러낸다.

미디어가 보여주는 노년의 타자화에는 두 가지 전형이 있다. 하나는 영화 〈집으로〉나 다큐멘터리에 등장하는 순박한 할머니·할아버지 — 과거에 고착된 존재로서 칭송받지만, 그 칭송은 그들이 과거에 묶여 있을 때만 성립한다. 다른 하나는 〈꽃보다 할배〉식의 비이성적이고 윤리적으로 열등한 존재 — 주위를 살피지 못하고(직진 순재), 감정 조절이 안 되는(백일섭) 존재로 재현된다.

04

학문도 자유롭지 못하다 — '노년기 적응'과 '삶의 만족도'

문화적 무의식은 학문적 실천에서도 드러난다.

노년기 적응 연구

🔍 적응 대상이 '노년기 자체'

'대학생의 적응'은 대학생활에 적응하는 것이고, '북한 이주민의 적응'은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노년기 적응'은? 적응해야 할 대상이 노년기 그 자체다. 노년이라는 시기 자체가 '문제적인 시기'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

삶의 만족도 연구

📊 1차원으로 축소된 삶

사회노년학에서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연구된 주제다. 다른 세대는 적성, 인지 특성, 직업 탐색 등 다차원적 연구 대상이 되지만, 노년에게 남는 것은 '만족하느냐 아니냐'라는 평면적인 단일 차원뿐이다. 추구될 만한 의미와 가치가 모두 증발한 문화적 황무지로 노년을 취급하는 무의식의 반영이다.

05

'여성 노인'과 '노인 여성' — 연령주의와 젠더의 교차

'여성 노인'과 '노인 여성' 중 어떤 표현이 더 자연스러운가? 대부분 '여성 노인'이 자연스럽다고 느낀다. 그 이유 자체가 문화적 무의식을 드러낸다.

남성 중심적 젠더 담론에서 여성성은 젊은 몸·자연에 묶여 있을 때 달성된다. 나이가 들어 젊은 몸에서 멀어지면 여성성의 근원에서 소외된다. 1970~80년대 젠더 검열이 심했을 때도 할머니는 담배를 피워도 괜찮았다. "여자가 아니니까." '아동'도 마찬가지다. '아동 여성'이 이상한 이유는 아동이 여성이기엔 너무 어리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너무 나이 많고.

반면 '노인 남성'이 어색한 이유는 다르다. 남성성은 문명적 성취를 통해 달성되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노인'은 성취에서 멀어진 존재다. 성취 없는 남성을 굳이 '남성'이라 부르니 어색한 것이다. 연령주의와 젠더 차별이 서로를 강화하면서, 노년 여성은 여성성에서, 노년 남성은 남성성에서 각각 추방당한다.

06

슈퍼 시니어의 환상 — 중년의 끝없는 연장으로서의 노년

최근 문화 산업이 주도하는 '긍정적 노년 이미지'가 있다. 철인삼종경기에 참가하는 할아버지, 100세에 스키 타는 어르신, 몸 만들어 모델로 서는 노년들. TV 프로그램 〈남자의 자격〉에 등장한 노년 합창단의 이름은 '청춘 합창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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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달라, 미래를 질주하다"

한 기업 광고의 카피: "할리데이비슨과 아우토반을 열망하는 젊은 할아버지. 그에게 나이는 더 이상 장애물이 아닙니다. 넘치는 열정으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해나가는 진정한 청년, 그가 눈부십니다." — 메시지는 명확하다. 그 열정을 지니고 청년으로 남으라는 것이다.

언뜻 긍정적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노년 담론의 새로운 장(章)이 아니라 노년 담론의 증발이다. 건강, 체력, 시간적 여유를 갖춘 극소수만이 달성할 수 있는 특권적 각본을 노년의 청사진으로 제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력이 약해지고, 병들고, 죽음에 가까이 가는 노년의 고유한 경험은 긍정이든 부정이든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젊은 몸과 젊은 욕망을 끝까지 유지하라는 이 신화 속에서,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는 어떻게 가능한가?

07

돈과 건강에서 멈추는 상상력

은퇴 대비 교육에 가면, 사람들이 궁금해하는 것은 딱 두 가지뿐이다. 재정 문제와 건강 문제. 노년의 삶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이 '돈과 건강'에서 멈추는 것은, 젊음과 소비와 자본과 권력을 좇는 것 이상의 삶에 대한 우리 사회의 문화적 상상력 자체가 고갈되어 있다는 증거다.

어쩌면 덫에 걸린 것은 노년만이 아니다. 비노년 세대 전체가 소비 자본주의가 사방에 깔아놓은 문화적 덫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노년의 가능성에 대한 상상력도 계속 낮은 상태로 유지되는 것은 아닌가.

08

꿈꾸기와 비우기 — 강연자의 노년의 꿈

정진웅 교수는 민망하다면서도 자신의 노년의 꿈을 공유했다. 지혜 가꾸기와 지혜 나누기. 지혜라는 것은 삶과 세계의 이치에 맞닿아 있는 인식이기에, 유행이 지나도 용도 폐기될 수 없다.

과업 1

✨ 꿈꾸기 — 지혜와 사랑

타자의 고통을 덜어주고,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마음이 열릴 때 — 그때 우리는 옹졸하지 않고 넉넉해진다. 나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면서 타자에게 보람이 되는 실천. 동서고금의 현자들이 전한 삶을 관통하는 지혜이기도 하다.

과업 2

🍃 비우기 — 내려놓기

삶의 유한성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비켜갈 수 없는 지향점. 삶의 굴곡에 일희일비하지 않게 되는 태도. 서울대 두 번 떨어진 일이 결국 얼마나 다행이었는지를 알게 되는 것. 잘난 존재가 되어 남 위에 서는 성취가 허망해지는 것.

꿈꾸기와 비우기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 노력은 다하되 결과에 집착하지 않는 것 — 과 같은 길이다. 방향성과 추구가 있어야 삶에 활기와 반짝이는 눈이 있다. 하지만 결과에 집착하지 않아야 무거운 삶의 괴로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이 역설을 동시에 살아내는 것이 노년의 과업이자, 사실은 모든 나이대의 과업이기도 하다.

노년이 꿈의 대상이 되고
꿈을 추구하는 시기가 될 수 있는 문화를 만드는 것.
그 과정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각 개인의 삶을 보람 있고 의미 있고
여유롭게 만들어줍니다.

— 정진웅 교수, 강연 마무리 중

Claude's Insight

노년이라는 단어가 꿈을 삼킨다

이 강연은 앞의 세 강연이 다루지 못한 가장 근본적인 층위를 건드린다. 언어와 무의식의 층위다. 이도훈 교수는 인구 구조를, 송병기 작가는 돌봄의 현장을, 심현보 대표는 실천의 모델을 보여주었다. 정진웅 교수는 그 모든 것의 밑바닥에 깔린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노년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언어 자체를 가지고 있는가?

'노인 사장'이 어색하고 '노인 빈곤'이 자연스럽다는 사실이 보여주는 것은, 단어 하나에 이미 사회 전체의 편견이 압축되어 있다는 것이다. 송병기 작가의 강연에서 요양원 할머니가 딸기를 먹지 못한 것도, 심현보 대표의 어르신들이 사원증 하나에 크게 반응한 것도, 결국 이 문화적 무의식 — '노인은 성취에서 멀어진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전제 — 가 만들어낸 현실이다. 제도를 바꾸고 사업 모델을 만들어도, 이 전제가 바뀌지 않으면 같은 구조가 재생산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슈퍼 시니어'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철인삼종경기를 하는 할아버지, 모델로 서는 할머니 — 이것은 부정적 노년 이미지에 대한 대안처럼 보이지만, 실은 노년 고유의 경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청년으로 남으라"는 것은 "노년이 되지 마라"는 것이다. 기력이 약해지고, 아프고, 죽음에 가까이 가는 것 — 이 경험들을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룰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도 여전히 "젊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 속에 갇히게 된다. 이것이 교수가 '공상'이라고 부른 것이고, 그 공상의 이면이 '외면'이다.

네 강연을 관통하는 하나의 실이 보인다. 이도훈 교수의 '부양비를 쪽수가 아닌 건강으로 재정의하라', 송병기 작가의 '노년의 언어가 비어 있다', 심현보 대표의 '복지 대상이 아니라 창작 주체로 보라', 그리고 정진웅 교수의 '문화적 무의식을 낯설게 보라'. 네 사람이 각자의 언어로 말하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을 가리키고 있다. 나이듦을 바라보는 프레임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프레임은 결국 단어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