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도시락 가방, 받아쓰기 그리고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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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연산동 두 번째 집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두 번째 집은 동네를 구성하는 블록 내부 작은 골목길 안에 위치한 집이었다. 철문으로 되어있었고 작은 마당에는 단풍나무와 옥상으로 올라가는 철제 계단이 있었던 집이다. 우리 집은 방 한 칸과 마루 그리고 마당에 부엌과 씻는 용도의 공간이 있었던 것 같다.

방 한 칸이라 좁은 느낌이지만 그때 사진을 찾아보니 마루가 그리 좁지 않아서 미닫이문으로 구성된 2개의 방 같은 느낌이다. (사진의 중요성)

이 집에서는 두 가지의 추억이 떠오른다.

🎒빨간 도시락 가방과 🔔금색 방울 소리

미취학 아동 시절 7살 때 남들은 유치원을 보냈지만 부모님은 웅변학원에 나를 보내셨다. 그 이유는 알 것 같지만 지금의 나를 보면 부모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는 못한 것 같다. 그 웅변학원은 연산초등학교 맞은편 건물 2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현재는 도로가 되어 그 터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웅변학원에서의 점심은 집에서 반찬을 가져가면 학원에 비치된 밥솥에 밥을 해서 먹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점심시간이 다가오면 향긋한 밥 냄새가 교실에 스며들기도 했던 것 같다.

반찬을 가지고 다녀야 하나 당연히 도시락 가방도 필요했겠지? 나의 선택인지 엄마의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나의 도시락 가방은 빨간색에 하얀색 꽃무늬가 들어간 가방이었고 (무늬는 정확하지 않음) 특이점은 금색 방울이 달려있었다. 그러니까 가방을 들고 다니면 자연스레 방울 소리가 골목을 매웠지.

당시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하셨는데 일명 ‘홀치기’라는 일이었는데(찾아보니 직물 염색 방법 중 하나였네), 집에 있을 때 엄마 옆에서 구경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학원을 마치면 학원 봉고 버스를 타고 집 근처에서 내리면 빨간 도시락 가방의 역할이 시작된다. 우리 집골목에 들어서면 방울 소리가 골목길을 울리고 마루에서 일하고 계시는 엄마도 내가 왔다는 걸 알게 된다.

당시 나에게는 학원을 끝내고 집에 가서 엄마를 본다는 설레임이 있었을 것이고, 엄마는 오늘도 아들내미가 학원을 마치고 무사히 집에 왔구나 하는 안도감이 있었을 것이다.

지금도 부산 집에 가면 비슷한 상황이 펼쳐진다. 대부분 캐리어를 끌고 가는데 현재 집 역시 골목 안쪽 집이다 보니 가방을 끌고 가면 문을 열어놨을 때는 그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지금 그 골목길을 들어서는 기분은 빨간 도시락 가방을 들고 다니던 7살 때와 다를 바 없는데, 엄마도 비슷한 느낌일까? 다음에 가면 물어봐야겠다.

바퀴 달린 시끄러운 캐리어를 끌고 대문 앞에 서서 ‘엄마~~’라고 부르면서

📝받아쓰기와 ⏱️오후반

 

그렇게 7살을 보내고 드디어 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는 좋은 기억도 있지만 이를 덮을 정도의 나쁜 기억들이 있어 애써 떠올리지도 않고 지금까지 연락하는 친구도 전혀 없다.

입학 당시에는 학생들이 많아 12개가 넘는 반이 있었고 교실이 부족해서 2학년 때까지 오전/오후 반으로 나눠서 11반 이후의 학급은 오후에 등교하는 형태였다. 당시 1학년은 지금처럼 선행학습이 활발하지 않았던 때라서 입학 후에는 한글 받아쓰기 시험을 치르곤 했다. 이 글을 쓰게 된 주요 소재답게 학창 시절 받아쓰기만큼 높은 점수의 과목이 없었다. 거의 만점 혹은 90점 이상의 점수를 기록하곤 했는데, 당연히 예습을 많이 했기 때문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엄마와 함께 예습을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윗글에서 썼듯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까지 엄마는 집에서 부업을 하셨고 그 이후에는 외부에 출퇴근하시며 일을 하셨다. 때문에 받아쓰기까지는 엄마가 홀치기를 하시고 그 옆에서 공부를 했었는데, 그냥 엄마가 옆에 있었고 함께 한다는 게 행복했기 때문에 공부가 재미있었고 받아쓰기 시험이 두렵지 않았던 게 아닐까.

그 이후에는 당연히 혼자 공부해야 했고 엉덩이가 무접지 않고 집중력이 좋지 않았던 나는 공부를 안 하는 학생이 되어 지금의 내가 만들어 졌다.

오후반 등교 시절 날이 따뜻했던 계절에는 엄마와 마루에서 햇살을 맞으며 함께 했던 기억이 난다. 걱정 근심이 없던 그 시절의 나는 너무나 행복했었고, 엄마와 함께여서 두려울 것도 없었다.

나도 이제 한국 나이 40이 되었고, 공식적으로는 더 이상 아이도 아니고 어른에 속하지만 여전히 아이와 같은 마음이며. 타지 생활 10년이 넘어가지만 여전히 고향과 가족이 그리운 철없는 놈이다. 아직은 건강하시지만 내가 앞으로 부모님을 몇 번이나 더 뵐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 슬프지만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어린 시절 부모님과의 추억이 머릿속에 더 자주 맺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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